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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평범한 봄날의 예술 산책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서울 삼청동 쪽으로 산책을 나갔다. 고궁과 현대적인 외형의 가게들, 그리고 예술 작품이 전시된 갤러리들이 모여 있는 길에서 봄 기운을 얻고 싶었다. 오래된 것과 전위적인 것들이 공존하는 길은 삶의 비유 같다.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삶에서 연결돼 있으니. 오래된 것들이 봄빛에 새롭게 깨어날 때에 감각적인 열망을 부르는 신작 예술 작품을 보는 일은 살아 있다는 실감을 안긴다.

“정신의 생명에 대해 생각해낼 수 있는 단 하나의 비유는 바로 살아 있다는 감각이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은 그대로 평범한 삶에도 적용된다.

경복궁 앞에서는 한복을 빌려 입고 사진 찍는 사람들이 보인다. 일상복을 입지 않은 순간의 포착이 활력이 돼준 것일까. 마스크에 가렸지만 웃고 있는 게 분명히 보였다. 비일상적인 경험은 일상을 더 확연히 드러낸다.

갤러리를 두 군데 연이어 들러 작품을 감상했다. 나올 때는 그림의 잔상을 더 즐기려고 도록을 챙기는 편인데, 도록 대신 전시를 다룬 단행본을 판매하는 곳이 있어서 반가웠다. 한 권의 예술 책이 또 이렇게 내 손에 들어왔다.

시골에서 성장한 나에게 예술 작품은 현실에서 볼 수 없는 환상 같은 것이었다. 서울에 집중된 전시회 소식은 남의 일 같았고, 예술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의 창작물은 시골 소녀에게는 가닿을 수 없는 세계의 것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예술 책을 읽게 됐다. 겉장이 찢어진 채 다락방에 쌓여 있던 책더미 속에서 발견된 그 책은 인상주의 화가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였다. 일렁이는 태양 빛의 변화를 반영해 대상을 보이는 그대로 그림을 그린다는 인상주의 화가들. 마네, 르누아르, 드가, 모네, 세잔…. 밝고 생동감 넘치는 그림들은 비슷해 보였으나 작업의 계기도, 그리는 방식도, 그림에 대한 철학도 다 달랐다. 어떤 사조로 묶여도 예술가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게 됐다. 십대에 읽은 이 예술 책은 나에게 특별한 위안을 안겼다. 당대 조롱받았던 인상주의 화가들이 후대에 환호를 받고 있다는 책의 내용은 예술의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갖게 했다.

어른이 된 뒤 낯선 여행길에 올라 미술관과 박물관에서 직접 감상한 원화들에서 책에서 읽었던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듯했다. 오래전 책을 읽으며 상상했던 예술 작품의 고유한 분위기가 시간이 지나도 또렷하게 기억나 원화 앞에서 환기됐다. 미술관은 예술 책이 데려다준 도착지 같았다.

이제 예술 책을 읽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만드는 직업인으로서 종종 생각한다. 원 작품의 크기와 질감과 결, 분위기는 종이 인쇄 매체에서 온전히 살릴 수 없다. 예술 책의 기능은 예술 작품을 보여주는 것이 다가 아니다. 예술 책은 독자들이 작가가 작품을 통해 상상력으로 구축한 아름다운 세계와 교감하게 한다. 어떤 난해한 예술 작품도 이야기를 통해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다. 책은 그 예술 작품을 내 것으로 흡수하는 데 도움을 주는 매체이다.

“내면을 들여다보라. 평범한 날의 평범한 마음을 잠시 자세히 바라보라. 마음은 수많은 인상을 받고 있다. 하잘것없고 환상적인, 곧 사라져버릴, 혹은 강철처럼 날카롭게 각인된 인상들을.” 일상 너머에 있는 절대적 순간을 꿈꾸었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도 평범한 날의 인상이 모여 무한한 아름다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기록했다. 나는 이 글을 읽고 평범한 순간을 영원으로 바꾸는 힘을 예술이라고 이해했다.

내가 봄 기운을 얻으려고 산책했던 길목에서 받은 인상들은 모여서 무엇이 될 것인가. 내가 보았던 예술 작품들은 아름다움에 대한 탐구를 통해 삶의 지리멸렬과 유한성을 일깨우고 육체는 소멸해도 계속될 불멸의 세계를 보여준 것이다.

예술 책은 상상 속에서 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긴다. 평범한 날에 읽는 예술 책은 현실의 땅에 발목 잡힌 사람에게 더 큰 세계를 꿈꾸게 한다. 봄날의 산책은 그런 의미로 남았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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