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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팔만대장경과 숫자 마케팅

장유승(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팔만대장경을 전부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다고 한다. 경판 하나의 두께가 4㎝에 가까우니 8만장을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은 건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수직으로 쌓을 때의 이야기다. 팔만대장경의 총 부피는 446㎥. 60평 아파트의 부피와 비슷하다. 경판 8만장을 테트리스하듯 빈틈없이 채워 넣으면 60평 아파트에 충분히 들어간다는 말이다.

팔만대장경이 보관된 해인사 장경판전은 가로 60m, 세로 8m, 높이는 어림잡아 5m다. 이런 건물이 두 채 있으니 부피는 약 4800㎥. 팔만대장경 부피의 열 배가 넘는다. 장경판전을 꽉꽉 채우면 팔만대장경 열 세트를 집어넣을 수 있다.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다. 공기 순환을 위해 경판과 경판 사이에 간격도 둬야 하고, 경판을 얹어 놓을 선반도 있어야 하고, 사람이 지나다닐 통로도 내야 하니까.

팔만대장경을 종이로 인쇄한다고 하자. 계산 편의상 종이 두께를 1㎜라고 하자. 경판을 종이에 인쇄하면 부피는 40분의 1로 줄어든다. 8만장의 종이를 전부 합쳐봐야 11㎥ 남짓이다. 2평짜리 고시원 방 한 칸에 충분히 들어간다. 이것을 한 줄로 쌓으면 백두산보다 높다는 팔만대장경의 실체다.

팔만대장경이 방대한 기록 같지만 이것도 생각하기 나름이다. 경판 8만장은 책 8만장에 해당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필독서 사서오경을 전부 합치면 1만장에 육박한다. 이밖에도 읽어야 할 책이 산더미였으니 평생 8만장 정도의 책을 읽은 사람은 드물지 않았을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글자 수는 총 5200만자. 언뜻 듣기에는 엄청나지만 일간신문 1부의 글자 수가 약 20만자다. 1년이면 7000만자가 넘는다. 신문을 정기구독하는 독자는 매년 팔만대장경 1.5세트를 읽는 셈이다. 오늘날에 비하면 팔만대장경의 정보량은 초라한 수준이다.

팔만대장경의 가치를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다. 목판인쇄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 책 한 장을 만들려면 판목 한 장을 만들어야 하는 비효율적 인쇄 방식이다. 대량 인쇄가 가능하다는 것은 장점이다. 하지만 팔만대장경의 수요처는 왕실과 일부 귀족, 대형 사찰로 많아야 수십 부에 불과하다. 이 정도라면 목판인쇄보다는 활자인쇄가 적합하다. 당시 고려는 금속활자 인쇄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팔만대장경을 활자로 인쇄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럼에도 굳이 비효율적 목판인쇄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팔만대장경은 읽으라고 만든 게 아니다. 알다시피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고 만든 것이다. 8만장의 경판이 지닌 주술적 힘을 믿었기 때문이다. 미신이라고 탓할 것 없다. 만약 팔만대장경 경판이 일찌감치 불타 없어지고 그걸로 인쇄한 종이뭉치만 남아 있다면 우리는 지금처럼 팔만대장경에 경외심을 품을까? 고작 2평짜리 창고에 쌓인 종이뭉치를 보면서 우리는 민족문화의 위대함을 운운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팔만’이라는 숫자는 구체적이면서도 가늠하기 어렵다. 그저 엄청나게 많다고 느낄 뿐이다. 인상도 강렬하다. ‘재조대장경’이라는 공식 명칭 대신 ‘팔만대장경’이라는 별명이 더 유명한 이유다. 하지만 그 숫자의 실체는 위에서 말한 대로다. 숫자는 일면의 사실에 불과할 뿐 총체적 진실은 아니다. 이것이 부풀려진 숫자를 내세우는 ‘숫자 마케팅(Numeric Marketing)’의 한계다.

2025년까지 80만 가구의 주택을 공급하겠다느니, 가덕도신공항의 경제적 파급 효과가 126조원이라느니 하는 따위 역시 숫자 마케팅이다.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숫자 마케팅에 질려서인지 여론의 반응은 싸늘하다. 우왕좌왕하는 부동산 정책과 선거용으로 급조한 대규모 국책 사업은 투기꾼의 먹잇감에 불과하다. 치적 홍보를 위한 실속 없는 숫자 마케팅의 결과다.

장유승(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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