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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자연의 ‘백색 소음’을 찾아서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집에 따로 제 방이 있는데도 아이들은 자주 카페로 공부하러 간다. 어릴 적 동생과 함께 방을 쓴 탓인지 나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쓸 때 혼자 있는 게 좋다. 카페 같은 열린 공간의 사소한 소리에도 아주 민감하다. 사춘기 이후 방문을 닫아건 채 독립생활을 고집했던 아이들은 틈만 나면 바깥으로 뛰쳐나가 카페로 달려가서 이른바 ‘백색 소음’을 즐기면서 강의를 듣거나 숙제를 한다. 나와 달리, 집에서 나는 크고 작은 소리를 모두 ‘유색 소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백색 소음은 폭넓은 주파수의 소리가 동시에 들려오는 현상이다. 인간은 특정한 주파수의 소리에는 본능적으로 귀 기울이면서 신경을 쓰지만, 적당한 크기의 소리가 뒤섞여 들리는 웅성거림에는 도리어 편안함을 느끼면서 집중력이 높아진다. 우리 몸이 ‘소리의 행성’인 지구를 터전 삼아 진화했기 때문이다.

자연은 한순간도 침묵하지 않는다. 우리 귀에 들리든 말든, 물이 흐르고 바람이 불고 땅이 움직이는 소리는 늘 우리 곁에 있다. 짐승이 울고 새가 노래하며 물고기가 첨벙대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나무와 풀과 꽃도 끝없이 소리를 낸다. 더 나아가 지구 자체에도 고유한 소리가 있다. 1950년대 독일의 물리학자 슈만은 지구가 7~10헤르츠의 주파수로 우주와 공명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지구는 소리로 가득하고, 우리 몸은 여러 소리가 함께 들리는 것에 아주 익숙하다.

소리 없는 공간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영화에서 무음(無音)의 순간은 언제나 무서운 사건의 전조를 뜻한다. 귀에 거슬리고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소리에 몸서리치는 만큼이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순간도 인간은 싫어한다. 소리 내지 않고 다가오는 것은 맹수 같은 포식자들이고, 절대적 침묵은 죽음을 뜻할 뿐이다. 조용한 공간을 바랄 때 우리가 실제로 찾는 곳은 좋은 소리가 들리는 공간이다. 물소리와 바람소리, 새소리와 벌레소리가 은은히 합창하면서 백색 소음을 이룩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우리는 고요와 평온을 느낀다.

그에 비해 현대의 도시는 너무 시끄럽다. 도저히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유색 소음이 시시각각 우리를 습격한다. 언제나 우리 신경은 팽팽히 당겨지고 우리 영혼은 산만히 출렁거리는 중이다. 정신 나간 채로 살아가는데 어찌 기쁨이 있겠는가. 도시에서 우리가 우울하고 불행한 것은 어디를 가든지 나쁜 소리를 피할 수 없는 까닭이다. 인간의 존엄과 독립을 박탈하는 강자들의 잔소리에서 수많은 기계가 쏟아내는 부자연한 소리까지 우리 고막을 습격하는 소음들이 너무나 잦다. 집이 답답한 아이들은 적당한 백색 소음과 함께 공부하려고 카페를 찾는다. 그러나 신경을 건드리는 도시의 주파수들을 피하려면 숲이 울창하고 물이 좋은 공원에 가거나 도시 바깥 좋은 곳을 찾아서 자연의 소리에 공명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많이 찾는 명승(名勝)은 단지 경치가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다. 정철의 ‘관동별곡’은 풍경의 여행이면서 동시에 소리의 여행이기도 했다. “백천동 곁에 두고 만폭동 들어가니/ 은 같은 무지개 옥 같은 용의 꼬리/ 섯돌며 뿜는 소리 십 리에 자자하니/ 들을 제는 우레려니 보니까 눈이로다.” 멀리에서 우레 같은 소리를 먼저 귀로 즐기고, 가까이에서 눈처럼 흩날리는 물보라와 찬연히 떠오르는 무지개를 넋을 잃고 바라본다. 예부터 명승은 이처럼 보는 풍경과 듣는 풍경이 혼연일체를 이룬 곳이어야 했다.

풍경에는 귀가 우선이고 눈은 나중이다. 종달새 우는 소리가 나거나 바람이 나뭇가지 쓰다듬는 소리가 들리면 우중충한 숲도 아름답게 느껴지고, 아무리 멋진 풍광도 듣기 싫은 소리가 들리는 순간 황급히 자리를 뜨고 싶어진다. 눈은 속일 수 있어도, 귀는 속일 수 없다. 좋은 소리가 없는 곳에서 인간은 결코 안식하지 못한다. 봄이다. 자연의 백색 소음에 마음을 적시러 아이들과 함께 산책을 떠나야겠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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