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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플라톤의 동굴과 가상 생태계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자금세탁, 재산은닉, 테러 자금 모금, 사이버 범죄.’ 한국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 정부와 중앙은행들은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를 거론할 때마다 범죄단체에나 어울릴 법한 이런 표현을 거침없이 사용한다. 거론 대상에 9·11 테러범 오사마 빈 라덴이나 북한 등 테러 지원국가를 대입하더라도 무리가 없을 정도다. 당국자들의 암호화폐에 대한 혐오감이나 선입견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오죽하면 정부가 언론에 가상화폐(virtual currency) 대신 암흑세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암호화폐(cryptocurrency)라는 용어를 사용해줄 것을 강요했을까. 찍혀도 단단히 찍힌 셈인데 그 근저에는 통화 당국이 발행하는 법정통화만 옳고 가상화폐는 허구라는 논리가 짙게 깔려 있다. 마치 현실 세계는 그림자일 뿐이며 이데아만이 진리라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를 보는 듯하다.

그런데 2017년 1차 폭락 때와 다른 점은 가상화폐 가격이 당국자들의 경고 발언 이후 크게 떨어지는가 싶더니 며칠 지나 다시 가격을 회복해 가는 현상을 반복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4일에도 재닛 옐런 미 재무부 장관과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의 우려 발언 이후 5400만원까지 밀렸던 비트코인은 10일 다시 6100만원 대로 올라섰다. 가상화폐의 이 같은 가격 회복력에는 투기적인 요인만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 실리콘밸리의 이단아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와 잭 도시 트위터 CEO를 필두로 월가 투자은행들이 앞다퉈 포트폴리오에 담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은 가상화폐에 대한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초기 단계지만 가상화폐를 기반으로 생태계가 활발히 구축되고 있다. 머스크 아내이자 뮤지션인 그라임스가 최근 대체불가능토큰(NFT)을 활용한 ‘워 님프(War Nymph)’라는 제목의 디지털 그림 컬렉션 10점을 온라인 경매에 부쳐 65억원어치를 벌어들인 것은 한 예에 불과하다. NFT는 기존 가상자산과 달리 코인 등 디지털 자산에 별도의 고유한 인식 값을 부여하는 블록체인 기술로 큰 인기를 끌고 있다. 할리우드 스타 린제이 로한과 록밴드 킹스 오브 리온 등도 NFT를 활용한 작품 발매에 동참하는 등 열기가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세계적인 경매회사 크리스티까지 이더리움을 거래화폐로 내건 NFT 미술작품 가상경매를 시작했다. NFT 작품의 인기는 희소성에 기인한다. 온라인에서 쉽게 복사하고 내려받는 기존 콘텐츠와 달리 작품 위조가 불가능하다. 천경자 화가의 미인도처럼 수십년 진위논란이 일어날 여지가 없다. 게다가 고급스러운 거실 벽에 장식용으로 걸어 놓거나 도난을 우려해 금고에 숨길 필요 없이 스마트폰에 담아 언제 어디서든 감상할 수 있다. 재산가만 소유하던 기존의 오프라인 작품과 달리 작품을 쪼개서 소유할 수 있어 작품 소유의 민주화에도 한 발짝 다가섰다.

샌드박스 게임 플랫폼 로블록스가 메타버스(가공+현실 세계)를 무기로 나스닥에 상장키로 하는 등 청소년들의 가상체험 역시 대세가 되고 있다. 메타버스에서 사용하는 아바타 역시 NFT 기술이 응용되는데, 드라마 ‘알함브라궁전의 추억’에서처럼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것이다. 이처럼 가상이 현실이 되는 상황에서 금융당국자들이 가상화폐를 놓고 ‘감히 어딜 법정통화를 넘보려 드느냐’고 외치는 게 공허해질 수 있는 것이다. 금융정보분석원(FIU)과 국세청을 통한 위험거래 포착과 탈세 감시 등 단속 위주 정책은 너무나 2차원적이다. 진화해가는 가상의 생태계를 두고 금융거래의 투명성 잣대만을 무기로 윽박지르기보다는 법정화폐와의 공생의 관계를 좀 더 적극적으로 모색할 때가 됐다.

이동훈 금융전문기자 d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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