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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이쁘지 그럼 안 이뻐?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대화에 듬성한 문장들이 늘고 있다.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서로 구멍 뚫린 문장만 늘어놓아 실소하게 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저번에 거기서 같이 본 걔 말이야.” “이건 그때 갔던 거기 그거 맛이다.” 수많은 단어들이 구체성을 잃고 거시기 수준으로 좌천된다. 이 증세는 ‘이름’에서 특히 심각해진다. 말하다 말고 몇 번이나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영화 ‘말레나’에 나왔고 이름이 우아한 음악 같던 그 사람 이름이 뭐지?” 내가 단서를 주워섬기기 시작하면 친구는 답답해 미치겠다는 표정과 함께 휴대폰 검색창을 연다.

많은 이름들이 세월에 닳아간다. 자모음이 마모되고 그저 그를 떠올렸을 때의 정서나 태초의 이미지만 몽글몽글하게 남는다. 이래선 안 된다며 뉴런에 긴장감을 불어넣기 위해 이름을 발굴해내려고 애쓰기도 한다. 뇌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그 이름을 긁어내려 애쓰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나의 할머니. 할머니는 치매를 앓다 돌아가셨다. 병환이 시작되고 얼마간은 격한 감정 변화나 예측할 수 없는 활동성을 보여 모두를 슬프고도 긴장되게 하셨는데 말미엔 점점 자신만의 세계로 파고들어가 거의 주무시기만 하셨다.

자손들은 주말마다 당신이 계신 요양병원을 찾았다. 할머니는 대부분의 시간을 눈을 감고 누워 계셨다. 우리는 할머니에게 집요하게 이름을 캐냈다. “엄마, 내가 누구유?” “할머니, 제 이름이 뭔가요?” “어머니, 쟤는 막내 둘째딸이잖아요. 쟤 이름 좀 말해 봐요.” 안부를 묻는 간단한 대화조차 불가능해진 지경에서 우리는 점점 기억을 놓쳐 빈손이 되어가는 할머니를 붙들기 위해 끝없이 이름을 물었다. 마치 그 이름이 매일 아득해지는 할머니를 붙들어놓는 닻인 양. 마치 그 물음표들이 점점 가라앉는 할머니를 건져올리는 갈고리인 양.

할머니는 우리의 거듭된 질문에 이름 몇 개를 우물거리시다가 이내 눈을 감아버리곤 하셨다. 귀찮다는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자손들은 눈꺼풀 안으로 자꾸만 숨어버리는 할머니를 몇 번이고 흔들어 깨웠다. 누군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머니, 얘가 누구예요. 얘는 둘째네 큰딸이잖아요. 얘 이름이 뭐예요?” 할머니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셨다. 모두가 간절한 마음으로 동그랗게 말려들어간 할머니의 입술에 시선을 모았다. 하지만 할머니는 끝끝내 모음 하나 입에 올리지 않으시더니 도로 눈을 감아버리셨다. 그러자 누군가 떠나가는 자동차 뒤에서 망연히 아무 말이나 외치듯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얘가 예뻐요, 안 예뻐요?”

레테의 강에 서서히 잠겨 들어가는 사람을 지켜보는 판국에 미추를 묻는 것은 당연히 아니었다. 예뻐하던 손녀를 왜 알아보지 못하냐는 안타까운 질문이었다. 그때 할머니가 스르르 눈을 뜨더니 말하셨다. “이쁘지, 그럼 안 이뻐?”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천연한 할머니의 대답, 모처럼 만들어진 그 문장다운 문장에 우리는 놀라고 기뻐 물기어린 웃음을 지었다. 할머니는 모두의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도로 눈을 감아버리셨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런 것 같다. 할머니도 내 이름 석 자는 다 놓아버리셨지만, 글자의 모서리들은 할머니의 세월에 닳아 흐릿해졌지만, 나를 떠올렸을 때의 몽글몽글한 정서만은 계속 품고 계셨던 게 아닐까. 내가 모니카 벨루치의 이름은 자주 까먹지만 그를 떠올릴 때 마음 바탕에 퍼지는 아름다움은 매번 새로이 떠올리는 것처럼 할머니도 나를 그런 식으로 기억해주신 것은 아닐까.

나의 할머니는 끝끝내 우리와 제대로 된 소통 한 번 하지 못하고 어룽어룽한 정신 속에서 유언조차 없이 돌아가셨다. 하지만 나는 할머니의 저 문장이 내게 개인적으로 남긴 유언이라 생각한다. 할머니는 흐릿해져가는 기억 저편에서 발굴해낸 무언가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침수되어가는 집에서 보물 한 점을 품고 나와 건네주셨다. 이름보다 또렷하고 이름보다 귀한 것을.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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