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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걷기 여행

남호철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걷기에 대한 예찬론이 많다. ‘모든 생각은 걷는 자의 발끝에서 나온다’ ‘걷기에 필요한 여가와 자유와 독립은 돈으로 살 수 없다’…. 근세 유럽 지식인들은 이런 어구를 동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굳이 미사여구를 사용하지 않더라도 걷기 여행을 하면 차를 타고 지나치면서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것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른바 ‘소확행’이다. 여기에 걷기운동은 근력을 증가시키고 혈압을 정상적으로 유지시킨다고 한다. 심질환 위험도 줄어든다고 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보약을 먹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코로나19가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난 11일 발표한 ‘2020 걷기 여행 실태 조사’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코로나 사태 영향으로 걷기 여행 참여율이 낮아지고 동반자 수도 줄어들었다. 참여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33.2%로 전년보다 3.8% 포인트 낮아졌다. 연령대별로 보면 40대 이상은 줄었고 30대 이하는 늘었다. 70대 이상의 참여율이 2019년 23.9%에서 지난해 5.8%로 대폭 낮아졌다.

걷기 여행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로 ‘시간이 없어서’(43.5%) ‘위험할 것 같아서’(28.9%) ‘코로나 때문에’(27.1%) 등 위험 요인을 많이 꼽았다. 그럼에도 자연과의 교감(64.1%), 신체 건강 증진(63.4%), 스트레스 해소(56.2%) 등을 위해 참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선호 야외관광지로 걷기 여행길(50.4%)이 가장 많이 차지했고 공원(42.5%) 산(34.5%) 바다(33.8%) 캠핑장(20.3%) 등이 뒤를 이은 것에 비춰볼 때 위험 요인만 사라지면 야외로 나가 자연을 즐기며 건강을 챙기려는 ‘잠재 수요’가 많다는 것이 분명하다.

걷기 여행 동반자 수도 2019년 4.57명에서 지난해 3.27명으로 줄었다. 동반자 유형은 가족이 60.1%로 가장 많고 친구(30.3%) 연인(12.8%) 순으로 뒤를 이었다. 거리두기와 집합금지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지난 1년 동안 가장 많이 방문한 걷기 여행길은 제주올레(24.9%)였다. 2018년 실태 조사를 시작한 이후 3년 연속 1위를 차지했다. 부산갈맷길(8.8%) 한라산둘레길(8.1%) 남파랑길(7.2%) 해파랑길(6.5%) 등도 많이 찾았다.

사람들이 지나가면 길이 되기도 하지만 길을 만들면 사람들이 지나간다. 지방자치단체들도 경쟁적으로 둘레길을 만들고 걷기를 적극 권장하고 있다. 한 지자체는 ‘SNS 포스팅 걷기 여행’ 행사를 연말까지 진행 중이다. 정해진 코스를 다니며 사진이나 영상을 찍어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에 여행 수기를 올린 다른 지역 출신의 나들이객 가운데 매달 3명을 추첨해 숙박권을 제공한다.

걷기 여행을 위해 굳이 제주 올레길까지 갈 필요는 없다. 도시 걷기 여행이 확산되는 추세다. 서울에선 주변을 둘러싼 북악산(백악산) 낙산(타락산) 남산(목멱산) 인왕산을 연결하는 한양도성 따라 걷기가 인기다. 남산도 빼놓을 수 없다. 장충동 국립극장 입구에서 출발해 국궁 연습장인 석호정과 조지훈 시비(詩碑)를 지나 케이블카 정거장 건너편 계단으로 팔각정까지 오르는 길이 애용된다. 전국적으로 보면 한반도 둘레를 걷는 ‘코리아 둘레길’도 조성돼 있다.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과 비무장지대(DMZ)까지 한반도 외곽을 연결하는 4500㎞의 ‘한국판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길이 여행객을 끌어들이는 힘은 치유와 힐링에서 나온다. 저마다 절실한 사연을 가슴에 품고 찾아온 걷기 여행객들은 대자연의 풍광 앞에 마음의 짐을 하나씩 내려놓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에너지를 얻는다.

남호철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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