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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겨우 할 수 있는 일

심희정 온라인뉴스부 기자


이건 새롭지 않은 이야기다. 이미 너무 흔해져 버려서 더는 놀랄 일도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얼마나 뻔한지 이제는 유형별 레퍼토리가 있을 정도니까. 그런데 이게 ‘내 일’이 되는 순간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얼굴은 발갛게 달아오르고, 머리는 한순간 작동하기를 멈춘다. 분주한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는 시간이 꽤 걸린다.

엄마가 동생의 전화를 받은 건 한가로운 평일의 오전 11시15분. 이상하게 전화 너머 주변이 시끄러웠다고 한다. 그리고 울먹이는 목소리. “엄마, 내가 친구 보증을 잘못 서서 빚이 좀 생겼는데 사채업자들이 어디론가 날 끌고 왔어. 제발 한 번만 좀 도와줘.” 누군가에게 맞고 있는 모양인지 울음 섞인 비명도 들렸다. 엄마는 너무 놀라서 눈앞이 하얘졌다. 공교롭게도 동생은 자영업자고, 주변에 사업하는 친구가 많았다. 누구에게 보증을 서줬을까, 친구들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전화를 넘겨받은 사채업자가 “돈 내놔!”하고 소리쳤다. 어딘가 미심쩍은 극적인 목소리에 엄마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이거 보이스피싱일 수도 있겠다.’ 곧이어 사채업자라는 사람에게 말했다. “보이스피싱인 거 알겠는데, 뭐라고 하는지 한 번 들어나 봅시다.” 전화는 끊어졌다.

보이스피싱임을 알아챘음에도 엄마의 마음은 계속 뛰었다. 혹시 뭔가 잘못됐을까 봐 동생에게 전화를 걸어보는 것도 무서웠다고 한다. 사채업자라는 사람들이 다시 전화를 받으면 어쩌나 걱정도 됐다. 엄마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보이스피싱 전화가 왔다고 알렸고, 아빠가 동생에게 전해 그제야 엄마는 무사하고 평온한 동생과의 통화를 마쳤다.

우리 가족이 비교적 의연하게 이 사태를 대처한 것은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다. 15년 전 아빠는 지금과 똑같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속 동생은 울먹이며 납치됐다고 말했고, 아빠는 전화를 끊고는 곧바로 동생이 다니는 학교에 전화했다. 동생은 역시나 무사하고 평온히 수업을 듣고 있었다. 밥을 먹다가 그 소식을 전해 들은 나는 “뭐 그런 일이 다 있었어”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놀란 마음은 감출 수 없었는지 먹던 음식이 얹혀 밤새 체한 몸을 돌봐야 했다.

2006년쯤부터 시작된 보이스피싱 사기는 매년 진화해 왔다. 15년 동안 학습한 우리는 보이스피싱 체험기를 재밌는 이야깃거리쯤으로 여기는 여유도 조금 생겼다. 한 달 전 엄마는 ‘엄마, 나 화면이 깨져서 수리 맡기고 다른 번호로 문자 하는 거야. 부탁이 있는데 문자 보면 답 줘’라는 그 유명한 피싱 문자를 받고 “감히 누굴 속이려고 들어”라며 호기롭게 웃어넘겼다. 그렇게 완벽하게 무장한 줄 알았던 사람도, 자식의 우는 목소리에는 마음이 무너지는 수밖에 없었다.

보이스피싱 사기를 당하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늘 의심하고, 정신을 단단히 차리는 것뿐이다.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게 조금은 서글프기까지 하다. 15년 전과 지금을 무사히 지나 보냈다고 해도 당장 내일 걸려들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어서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부모님 휴대전화에 악성 프로그램이 있나 확인해 보고, 스팸 차단 기능이 있는 앱을 깔아 드리는 것뿐이라 그것만을 겨우 했다. 나중에 또 이런 일이 생긴다 해도 한낱 에피소드 정도로 듣고 넘어가기를 조용히 바랐다.

이런 일을 겪었거나 걱정하는 모두에게 할 수 있는 일도 겨우 이런 체험기를 나누는 것뿐이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로 걸려온 전화도 이상한 소리를 하면 의심해보고, 모르는 번호라면 더욱 긴장을 늦추지 말 것. 문자로 오는 수상쩍은 링크는 눌러보지 말고, 은행 보안카드나 계좌 비밀번호 같은 민감한 개인정보를 요구하면 절대로 응하지 말 것. 무슨 일이 있어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건네지 말 것. 위급한 연락을 받으면 판단이 흐려지기 쉬우니 누구에게라도 이 일을 공유하고 생각을 정리할 것. 우리는 그동안 너무 많이 당했다.

심희정 온라인뉴스부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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