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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의리에 죽고 사는 정권

천지우 논설위원


조국 사태가 한창이던 2019년 9월에 ‘유 고, 위 고’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글감 재활용은 게으른 짓이지만, 그때와 비슷한 상황이 반복되는 게 답답해서 다시 꺼내든다. “You go, We go(네가 가면 우리도 간다)”는 소방관들의 이야기를 다룬 미국 영화 ‘분노의 역류’(1991)에 나오는 대사다. 방화 살인을 저지른 동료가 난간에서 불구덩이로 막 떨어지려 할 때 그를 힘겹게 붙잡고 있던 소방관이 저 대사를 읊조리고 함께 추락한다. 오랜 동지의 잘못을 알게 됐지만 차마 그를 버릴 수는 없으니 같이 죽음으로 뛰어든 것이다. 대단한 의리요 동지애다. 2년 전 여권 인사들도 조국 전 장관을 향해 저 대사를 외치고 있는 것 같다는 내용의 칼럼을 썼다. 동지를 감싸는 이유는 알겠으나 드러난 허물을 애써 부인하며 동지애만 발휘하는 건 공멸하는 길이라 생각했다.

요즘 다시 문재인 정권 주변에 시대착오적인 의리와 동지애가 넘쳐난다. 이번엔 박원순 전 서울시장과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향한 것이다. 성추행으로 피소되자 극단적 선택을 한 박 전 시장과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일로 옥살이를 하고 나온 한 전 총리, 이들의 과오는 분명하다. 하지만 현 정권 내부와 지지층 중에는 두 사람의 허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허물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박 전 시장의 죽음도, 한 전 총리의 유죄도 몹시 억울해 한다.

임종석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최근 박 전 시장을 기리는 글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 “용산공원의 숲속 어느 의자에는 매순간 치열하게 사람의 가치를 높이고자 했던 박원순의 이름 석 자를 소박하게나마 새겨 넣었으면 좋겠다.” 그가 박 전 시장 밑에서 서울시 정무부시장을 했으니 안타깝고 애틋한 감정이 있을 수 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본인 자유다. 하지만 여권의 유력 인사인 그가 그런 감정을 대놓고 표출하는 건 의도가 무엇이든 매우 부적절하다. 동지애를 과시하며 박 전 시장을 추켜세울수록 성추행 피해자의 피해 사실이 하찮아지거나 부당한 것으로 취급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최근 한 전 총리 사건 수사팀의 모해위증교사 의혹에 관해 수사지휘권을 발동했으나 기소하는 데 실패했다. 한 전 총리에 대한 판결을 뒤집지는 못하더라도 과거 수사 과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음을 부각시키려 했는데 잘 안 된 것이다. 한 전 총리의 억울함을 푸는 일에 왜 그토록 무리하게 달려들었는지 의아하다. 무엇이 억울한지도 잘 모르겠다. 정권 내부에서만 절실히 신원(伸寃)을 바랄 뿐이지, 국민 공감은 얻기 힘든 사안이라 생각한다. 정권이 오랜 동지에 대한 의리를 지키려 한 일이었을 뿐, 국가적으로 꼭 필요한 일은 아니었다는 얘기다.

박 전 시장과 한 전 총리에 대해 의리를 지키고픈 마음은 알겠다. 둘 다 여권의 거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의리 지켜서 무얼 이루려 했고, 어떤 결과를 냈는지 묻고 싶다. 민생을 개선하는 것과는 관계없는 일이었다. 혼란과 다툼, 그로 인한 짜증만 남았다.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급락한 것이 부동산 문제 때문이라고 하지만, 조국 사태부터 지속된 ‘우리 편 잘못은 인정 않고 무조건 감싸기’ 행태도 한몫했다고 본다. ‘항상 옳고 선한 우리와 나머지 청산해야 할 적폐들’로 편을 가르는 정권의 인식은 너무나 저열하고 해롭다. 민주당 고민정 의원이 지난 23일 소셜미디어에 공유한 영상은 파란색(민주당)에 아무리 실망했어도 탐욕 그 자체인 빨간색(국민의힘)을 찍어선 안 된다는 내용이다. 영상은 ‘사람에 투표해주십시오’라는 말로 끝난다. 여기서 사람은 민주당 후보일 테니 참으로 오만한 발상이다.

“당신을 경멸하고 해를 입히려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고 있고, 그들을 보기만 해도 지독한 혐오감이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느낀다면, 그리고 그들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면 당신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라투스트라의 제자가 된 셈이다.” 영국 역사학자 시어도어 젤딘이 한 말이다. 젤딘에 따르면 고대 페르시아의 예언자 자라투스트라는 인생은 영원한 전쟁이며, 모든 사람은 사탄의 지배를 받는 적에 둘러싸여 있다는 믿음을 세상에 심었다. 즉 그는 세상을 친구와 적으로 갈라놨다. 지금 분노하는 사람들을 보면 상당수 한국인도 자라투스트라의 제자가 돼버린 느낌이다.

천지우 논설위원 mogu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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