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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희망의 사람들] 아픈 흉터로 남은 그날의 상흔… 더디지만 아물겠지요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크게 부서진 옛 북한 노동당사 1층 내부. 벽체가 뻥 뚫려 무너질 우려가 있어 철제 기둥을 박아 넣은 게 보인다.

“부릉∼부릉.”

지난 3월 말의 주말, 봄볕 아래 졸고 있던 옛 북한 노동당사가 놀란 듯 깨어났다. 오토바이를 타고 온 바이크족의 등장으로 조용하던 이 근대 유산 주변이 아연 활기를 띠어서다. 그들이 타고 온 할리데이비슨의 금속성이 폐허가 된 건물의 콘크리트와 대비를 이루며 색다른 조합을 만들어냈다.

강원도 철원군의 대표 관광지인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사(국가등록문화재 제22호). 철원이 북한 땅에 속했던 1946년 노동당사 철원지부로 건설됐다. 돼지열병과 코로나바이러스 사태로 관람객이 끊기다시피 했던 이곳도 해가 바뀌고 봄이 오면서 관람객이 눈에 띄게 늘고 있다.

러시아식 건축물의 미감을 보여주는 아치형 파사드.

연천·포천·화천 등 일대를 관장하기 위한 당 조직으로 신축된 철원지부는 북한 권력의 핵심인 노동당의 상징이었다. 남침을 위한 진격의 거점이었다. 때문에 한국전쟁 중 철원을 수복한 미군의 폭격을 맞았고 노동동사와 주변 시가지 일대가 초토화됐다. 지금 노동당사는 뼈대만 남은 채 1층만 건물 형태를 유지하고 있고 2, 3층은 폭삭 주저앉았다. 그래도 정면 파사드는 멀쩡해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다봤을 이 3층짜리 러시아식 최신 건물의 위용을 떠올리게 한다.

철원은 분단과 함께 남북으로 쪼개진 행정구역이 됐다. 강원도가 남북으로 쪼개졌듯 말이다. 노동당사는 토박이 철원 주민에게는 건드리면 덧나는 상처 같은 것이다. ‘승일교’가 그런 것처럼. 한탄강 위를 가로지르는 승일교는 분단 전 북한에서 다리를 먼저 놓았다. 절반쯤 놓은 상태에서 전쟁이 터졌고, 전쟁 중 미 공병대가 북진을 위해 나머지 반을 완성했다. 주민들은 원래 이름을 놔두고 당시 남북한 통치자였던 이승만의 ‘승’, 김일성의 ‘일’에서 따서 다리 이름을 불렀다.

수복 당시 생존자들의 구술 작업을 했던 향토사학자 김영규 철원역사문화연구소장은 “인민군이 퇴각하며 상당수 철원 주민들을 북으로 몰고 갔다. 그때 산속에 숨어들어 언제 내려가야 살 수 있나 절체절명의 시간을 보낸 주민들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현대사에서 우리는 반공이 국시이던 시절을 보냈다. 노동당사를 바라보는 ‘수복 1세대’의 심사는 복잡했을 거 같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다. 분노와 상처도 끌어안고 가야 할 역사가 됐다. 다크 투어리즘이 그걸 말한다. 안보관광은 이제 평화관광이 됐다.

노동당사 앞에서 쉬고 있는 라이딩족들.

노동당사를 세상에 크게 알린 건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1994년 발매된 ‘발해를 꿈꾸며’ 뮤직비디오를 여기서 찍었다. 이후 다크투어리즘의 명소가 됐다. 북한에서 발원해 철원을 흐르는 한탄강의 주상절리 절경과 철원의 너른 평야까지 볼 수 있어 자동차 여행객은 물론 오토바이와 자전거를 타는 ‘라이딩족’에게도 인기 있는 코스가 됐다. 고교 동창들과 바이크를 타고 온 자영업자 조세진(경기도 가평·45)씨도 그런 여행객 중 하나다. 그는 90년대 중반 철원 인근에서 군 생활했다. 마침 군 시절 추억도 떠올릴 겸 철원으로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친구들과 달려온 것이다. “그땐 주적(主敵) 1번은 북한이라고 엄청 교육받았는데…. 북한에 대한 인식이 이렇게 달라지다니요.”

예전엔 들어갈 수 있었던 노동당사 건물 내부는 이제는 출입금지 구역이 됐다. 서태지가 뮤비에서 흰 비둘기를 날렸던 건물 내부를 더는 들어갈 수 없다. 건물 잔해는 갈수록 허물어져 지금은 곳곳에 철심을 박아 건물을 지탱하고 있다.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쳐 내부 관람을 막고 있는 것이다.

철원의 역사는 드라마틱하다. 일제강점기 경원선(서울-원산)의 핵심 기차역이 있었던 철원은 경부선의 대전에 버금가는 물류 중심지였다. 신생대에 철원 북방 오리산 화산이 폭발하며 만들어진 평야는 후삼국의 호걸 궁예가 태봉국 도읍으로 삼을 만큼 욕심냈던 곡창지대가 됐다. 일제강점기엔 전북 군산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수리조합이 있었던 일제 수탈의 무대이기도 했다고 김 소장은 전한다. 또 금강산 관광이 대유행하던 1930∼1940년대 철원에는 금강산 행 전차가 운행되고 있었다. 경원선을 타고 기차에서 내린 뒤 전차로 갈아타려는 금강산 단체관광객으로 흥청거렸을 ‘대도시 철원’을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철원읍을 가로질러 노동당사 앞을 지나는 ‘금강산로’는 그 전차가 다녔던 길이다. 하지만 도로 주변은 지금 허허벌판이다.

“인구 2만의 아주 큰 읍이었지요. 저 논밭 자리엔 법원과 극장과 아주 큰 시장이 있었습니다.” 김 소장이 보여준 당시 엽서 사진을 보니 지금의 허허벌판 자리가 집들로 빽빽하다. 해방 후 북한은 이런 번화한 읍의 끝자락 언덕진 곳에 노동당사 철원지부를 지었던 것이다. 지금은 생경하게 뼈대만 남아 화려했던 과거를 증거한다. 가히 상전벽해다. 한때 10만명의 철원 인구는 지금 4만6000명으로 반 토막이 났다. 분단으로 국토의 중심은 변방이 됐다.

‘통일을 기원하며’라고 누군가 써놓은 낙서.

다시 서태지 뮤비로 돌아가자.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자료 사진과 곳곳에 총탄이 박힌 노동당사 내부도 볼 수 있다. 그곳에서 서태지는 평화의 상징인 흰 비둘기를 날렸다.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흘렀다. 우리는 안다. 더디더라도 평화가 조금씩 다가왔음을. 저 ‘금강산로’를 따라 육로로 금강산 가는 날도 꼭 올 것임을.

후원: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철원=글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사진 변순철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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