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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우리는 누구나 한 권의 책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책을 만들던 출판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어느 직업이든, 어떤 삶이든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으니까 출판인이 책을 내는 것은 딱히 이상하지 않다. 글 쓰는 삶을 운명으로 삼은 문학인이나 지식을 사회적으로 공유하는 의무와 의미를 잘 아는 지식인의 책만 나오는 세상이 이미 아닌 것이다. 다양한 직업군의 저자가 등장해 펼치는 생생한 삶의 이야기들은 책 세계를 풍요롭게 한다.

그간 출판인은 저자의 고유한 원고를 어떻게 세상에 알릴지 고민하고 원고 교열과 편집 디자인, 종이 선택과 인쇄 등 제작과 홍보 마케팅까지 적극 주도하며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직업 정신을 발휘해왔다. 책을 만들되 책 뒤에 숨어 있고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던 출판인들이 책을 내는 세태는 그래서 흥미로운 현상으로 보인다.

무엇이 출판인들을 글 쓰게 하는 것일까. 출판인이 내는 책의 성격을 간단히 규정짓기엔 어려움이 있다. 인문적 성찰이 있는가 하면 문학적 여운이 남거나 실질적 정보를 체계적으로 일러주는 등 장르도 다양하다. 그동안 문인 활동을 겸하는 출판인도 꽤 있었다. 출판인 출신 작가도 많다. 글을 다룬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니까. 그런데 출판인들의 책이 쏟아지는 트렌드가 화제가 된 것은 저자 개인의 정체성을 넘어서는 출판 환경의 변화 때문이다.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글로 표현하는 것, 글을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일은 점점 보편적 일상이 되고 있다. 온라인 플랫폼 어디에서나 글을 쓸 수 있고, 그 글을 묶어 책을 출간하는 과정이 이전처럼 복잡하지 않다. 한마디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책을 낼 수 있는 상황이다. 기술 혁명이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듯이 출판 제작 기술도 시스템화되면서 책 만들기가 수월해졌다. 책과 관련된 일반인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고 출판의 실무적인 일은 신비로운 영역에 놓여 있지 않다. 출판 정신의 문제는 기술적 진보와 상관없이 더욱 인문적 관심의 영역이고 타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깊고 복잡한 차원이긴 하지만.

출판인이 쓴 책은 책 만들기의 이해와 직업적 성찰 등에 도움이 되는 것일까. 일반 독자에게 호소력 있게 읽히고 팔리는 책도 여럿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 출판인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책을 만났다. 출판인이 쓴 책의 장르가 어디까지 확장되는 것일까 하는 놀라움을 안긴 책은 ‘막내의 뜰’이다. 오랫동안 올바른 출판 정신으로 꾸준히 어린이책과 인문책을 만들어온 출판인의 저작물인 ‘막내의 뜰’은 유년 시절에 대한 기록이다. 저자가 직접 그린 그림까지 담긴 이 책은 교육자인 아버지의 발령 때문에 여러 관사를 전전했던 기억을 되살려 세상살이의 기원이 된 집과 사람, 자연에 대한 섬세한 고찰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과거는 구원을 기다리고 있는 어떤 은밀한 목록을 간직하고 있다”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인용한 저자 강맑실 출판인은 “구원을 기다리는 은밀한 목록이 가득한 유년을 향한 그리움, 이 책은 그런 그리움에서 시작되었다”고 고백했다. 일곱 형제의 막내는 할머니와 기르던 염소, 개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하나의 삶이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음식과 정을 나누는 어머니에게서 사랑을 배우며 평화를 만끽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저자가 출판인이라는 걸 환기시키는 대목이 있었으니 그건 독서 체험이었다.

“‘보물섬’을 읽으며 막내는 자신이 마치 주인공이라도 된 듯, 짐이 두려워하고 용감하게 외칠 때는 몸에 힘을 주고 함께 외치면서 읽어나갔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책 속 인물과 삶에 빠져드는 것이다. 나도 그처럼 ‘막내의 뜰’을 읽으며 저자의 페르소나인 막내에 깊이 공감했다. 숲과 나무, 꽃과 대화하는 사람, 대가족 관계망에서 서로의 개성과 인격을 존중하는 마음은 삶의 구원이 돼줄 은밀한 목록이 됐다.

누구에게나 ‘나만의 이야기’가 있다. 글쓰기에 용기를 낸다면 책을 통해 그 이야기는 우리의 것이 된다. 출판인들이 직접 쓴 책으로 말하듯, 우리는 누구나 한 권의 책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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