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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한·미동맹과 가스라이팅

라동철 논설위원


특정한 사람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함으로써 상대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정신적·심리적으로 지배하는 현상을 가스라이팅(gaslighting)이라고 한다. 영국의 극작가 겸 소설가 패트릭 해밀턴이 1938년 발표한 희곡 ‘가스라이트(Gaslight)’에서 유래된 심리학 용어다. 희곡의 얼개는 이렇다. 남편은 오래전 살해한 여성의 보석을 훔치려고 집안의 가스등을 어둡게 조작한다. 아내가 이상하게 여겨 가스등이 어둡다고 말하면 그렇지 않다, 과민반응을 보인다며 아내를 몰아붙인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아내는 자신이 현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생각하기에 이르고 점차 판단력이 흐려져 남편에게 의존하게 된다. 연극 무대에 올려져 인기를 끈 이 작품은 1944년 미국에서 같은 이름의 영화로 각색돼 대성공을 거뒀다. 상대를 사실상 정신적 노예 상태로 만드는 가스라이팅은 데이트 폭력이나 가정 폭력, 집단따돌림(왕따) 등에서 간혹 엿볼 수 있다.

김준형 국립외교원장이 자신의 신간에서 한·미 관계를 가스라이팅과 유사하다고 주장해 구설에 올랐다. 김 원장은 “한국은 한·미동맹에 중독돼 왔다. 압도적인 상대에 의한 가스라이팅 현상과 닮아 있다”고 했다. 한국인과 교민들이 지난해 4월 미국 백악관 청원 홈페이지에 문재인 대통령 구속 청원을 한 것을 한·미동맹이 한국의 이성을 마비시킨 가스라이팅 사례로 언급했다. 기자간담회에서는 한·미동맹이 신화화돼 상식적,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판단을 못하게 됐다고 주장했다. 한·미동맹의 가치를 폄훼하는 도발적 주장들이다.

한국과 미국의 국익이 일치하는 것은 아닐 테고, 우리도 국익 우선 관점에서 한·미 관계를 점검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김 원장의 주장은 나가도 너무 나갔다. 사용한 단어들도 외교 문제를 다루는 외교부 소속기관의 수장치고는 너무 거칠고 자기비하적이다. 고위공직자로서 부적절한 처신일 뿐더러, 외교적 결례다. 우리 외교에 부담이 될 뿐이다.

라동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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