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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개천에선 용이 나지 않는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정사 ‘삼국지’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조에게 쫓겨 오갈 데 없어진 유비가 손권을 찾아왔다. 손권의 책사 주유는 유비의 실체를 간파하고 손권에게 조언했다. “유비는 영웅의 자질을 지닌 데다 관우 장비 같은 용맹한 장수까지 거느리고 있다. 남의 밑에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러니 유비를 붙잡아 두려면 내 말대로 해라. 먼저 야망을 빼앗아라. 유비에게 화려한 집과 아름다운 여인, 좋은 물건을 주어라. 향락에 젖은 그는 천하를 향한 의지를 잃어버릴 것이다. 다음은 조력자를 제거하라. 관우와 장비를 유비 곁에서 떼어내어 전쟁터로 보내라. 세 사람을 한곳에 두면 절대 안 된다.” 주유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용이 비구름을 만나면 결국 연못 속에 있지 않을 것입니다.”

연못 속의 용은 유비를 두고 한 말이다. 주유의 말을 거꾸로 해석하면, 유비가 손권이라는 연못을 벗어나 비상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본인의 의지와 노력이다. 유비는 돗자리 짜던 어린 시절부터 황제를 꿈꾸었다. 마흔이 넘도록 가진 것 없이 천하를 떠도는 신세였지만 눈앞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민심을 얻으려 애썼다. 둘째, 관우 장비처럼 유능한 조력자다. 그들은 유비와 생사를 함께하기로 맹세한 이래 위기에 빠진 유비를 수없이 구해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유비는 일찌감치 죽은 목숨이다. 훗날 유비가 천하의 삼분지 일을 손에 넣은 것도 순전히 그들의 힘이었다. 셋째, 비구름 같은 절호의 기회다. 쨍쨍한 날씨에 승천하는 용은 없다. 용이 승천하려면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야 한다. 기회를 만나지 못하면 제아무리 유비 같은 영웅도 별 수 없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 유능한 조력자, 절호의 기회, 이 삼박자가 어우러질 때 연못에 갇힌 용은 비로소 하늘로 날아오른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조건도 다르지 않다. 본인의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부족하다.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역전의 기회도 만나야 한다. 운이 따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맨손으로 세계 정상의 기업을 일구어낸 창업자들조차 “나의 성공은 운”이라고 고백하는 이유다. 그냥 운이 좋았다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조건이 운 좋게 맞아떨어졌다는 이야기다. 겸손이 아니라 사실이다. 누구나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공식은 깨진 지 오래다. 입지전적 성공 신화는 옛날 이야기다.

개인 의지와 노력보다 주어진 조건이 힘을 발휘하는 세상이다. 능력주의는 공정하지 않으며,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하는 경쟁은 불평등의 세습일 뿐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런데 주어진 조건에 힘입은 사람은 그 덕택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되레 공정한 경쟁의 승자로 자부한다. 조건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경쟁이 공정할 리 만무하다. 그것이 공정하다고 믿는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돈도 실력’이라는 누군가의 명언에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셈이다. 남다른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열악한 조건을 극복한 개천용의 존재를 부정하지는 않겠다. 문제는 그들 역시 운 좋게 이룬 성취를 오롯이 자신의 공으로 돌린 결과,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나오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개미둑에서는 소나무가 자라지 않고, 도랑에서는 용이 나오지 않는다.” 민백순의 ‘회우록서’에 나오는 말이다. 작은 개미둑은 소나무가 자라는 곳이 아니다. 소나무는 높은 산에서 자란다. 좁은 도랑은 용이 나오는 곳이 아니다. 용은 넓은 바다에서 나온다. 애당초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를 기대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개천은 원래 용이 나오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용이 되지 못한 자의 의지 박약과 노력 부족을 탓해왔던 것은 아니었을까.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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