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불씨 ‘막말’ 파묻자 마을이 잠잠… 예천 ‘말무덤’의 교훈

스토리가 있는 경북 예천 나들이

4·7 재·보궐선거가 막을 내렸다. 선거 과정에서 입에 담기 어려운 과격한 발언이 쏟아졌다. 곳곳에서 원색적인 막말 난타전이 벌어지자 여야 지도부기 각 후보와 소속 의원들에게 ‘막말 경계령’을 내릴 정도였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 ‘말무덤’(파란 원) 앞에 설치된 조형물. 하늘을 배경으로 입술을 손가락으로 가리며 ‘쉿’하는 형상이다.

말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이색 여행지가 있다. 경북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 있는 말무덤이다. 말(馬)이 아닌 말(言)의 무덤 언총(言塚)이다. 400~5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해오는 얘기는 이렇다. 한 마을에 김녕 김, 밀양 박, 김해 김, 진주 류, 경주 최, 인천 채씨 등 여러 성씨가 살았는데 문중끼리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사소한 말 한마디가 씨앗이 돼 큰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한 나그네가 이곳을 지나가다가 마을의 산세를 보고는 한마디 던졌다. “좌청룡은 곧게 뻗어 개의 아래턱 모습이요, 우백호는 구부러져 위턱의 형세라. 개가 짖어대니 마을이 항상 시끄럽겠구나.”

마을 사람들은 나그네가 말한 ‘개 주둥이의 송곳니 위치인 논 한가운데에 바위 세 개를 세우고 앞니 위치에는 개가 짖지 못하도록 재갈바위 두 개를 세운 뒤, 모두 사발 하나씩을 가져와 싸움의 발단이 된 말썽 많은 말을 뱉어 담고는 구덩이를 파고 묻었다. 이때부터 마을에서 싸움이 사라지고 이웃 간에 두터운 정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말무덤 바로 앞에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는 조형물이 우뚝하다. 주변 바위에 ‘한 점 불티는 능히 숲을 태우고, 한마디 말은 평생의 덕을 허물어뜨린다’ 등 말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금언이 새겨져 있다.

대죽리에는 매죽헌, 퇴계 이황 외가터, 만죽정, 유일한 박사 생가, 영모정, 쌍효각, 쌍호재각 등이 있다. 이곳은 퇴계 이황의 외가가 있던 곳으로 퇴계가 어린 시절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퇴계의 외조부는 춘천 박씨 박치(朴緇)이다. 자는 현명이다. 후손은 상주시 사벌면에 많다. 대죽리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이개립(1546~1625)과 죽림 권산해(1403~1456)의 고향이기도 하다.

예천군 호명면 들녘에 세워진 곤포 사일리지는 감사의 말을 담았다. 벼 수확이 끝나고 볏짚을 말아 놓은 곤포 사일리지가 코로나19 퇴치를 위한 홍보조형물로 설치돼 눈길을 끈다. ‘의료방역 관계자 여러분 정말 정말 고맙습니다’ ‘마스크 착용은 이웃사랑입니다’란 글이 쓰여 있고 주사기를 든 남녀 커플 간호사의 친근한 캐릭터도 담겨 있다.

사람처럼 이름을 얻고 세금을 내는 석송령.

예천에는 특이한 나무가 있다. 먼저 감천면 천향리 석평마을의 천연기념물 제294호 석송령(石松靈). 사람과 똑같은 자격과 지위를 갖고 600년을 살아온 나무다. 뿌리 부분에서부터 줄기가 여러 개로 나뉘며 옆으로 펼쳐지는 반송(盤松) 종류다. 키는 10m 정도밖에 안 되지만 동서로 24m, 남북으로 30m나 뻗어 넓은 품을 자랑한다.

석송령이 마을에 자리 잡은 얘기는 이렇다. 풍기 지역에 큰 홍수가 나서 마을 앞 개울로 온갖 잡동사니가 떠내려 왔다. 그 가운데 뿌리째 뽑힌 소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이를 본 나그네가 나무의 운명을 안타까워하며 건져내 개울 옆에 심은 게 시작이라고 한다.

나무는 자라나 대한민국 국민의 지위를 증명하는 호적번호를 가졌으며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으로 등기된 토지까지 소유했다. 납세의 의무로 재산세(토지세)도 꼬박꼬박 물고 있다. 나아가 자신의 토지에서 재산을 증식해 마을 살림살이를 위해 ‘장학금’ 등을 흔쾌히 내놓는다.

나무가 사람과 똑같이 석송령이라는 이름으로 호적에 등기되고 재산을 갖게 된 것은 1928년의 일이다. 당시 이 마을에는 이수목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재산은 넉넉했으나 아들이 없어 근심이 많던 그는 낮잠을 자다가 꿈에서 ‘걱정하지 마라’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깨어났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게 바로 이 나무였다. 그는 나무에 재산을 물려준다면 오랫동안 잘 지켜지리라는 생뚱맞은 생각을 했고 곧바로 실행했다. 석평마을에서 생명을 얻은 나무여서 석씨 성을 붙이고, 영혼이 있는 소나무라는 뜻에서 영혼 영(靈)과 소나무 송(松)을 써서 석송령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적 등기를 마치고 자신의 전 재산인 토지 6611㎡(2000평)를 나무에 이전했다.

황목근.

예천에 세금을 납부하는 나무가 하나 더 있다. 용궁면 금원마을 천연기념물 제400호 황목근(黃木根)이다. 5월에 황색 꽃이 핀다고 해서 황씨 성을, 근본 있는 나무라는 뜻에서 목근이란 이름까지 얻은 500년 수령 팽나무다. 금원마을에는 100여년 전부터 성미(誠米)를 모아 공동 재산을 형성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들여 모은 마을 공동 재산을 통째로 황목근에 넘겨준 것은 1939년의 일이다.



예천=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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