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변화를 어떤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옳을지 난감할 때가 있다. 너무 빨리 매우 다양하게 변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이 세상이 점차 ‘빌런들의 세상’이 돼가는 것은 아닌가 싶다. 사전적 의미로 ‘빌런’은 ‘무언가에 집착하거나 평범한 사람과 다른 행동을 보이는 괴짜’를 일컫는 말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악당’이나 ‘악역’을 의미한다. 더 나아가 일상적인 삶에서 무엇인가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사람들을 ‘~빌런’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가령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못 견디는 사람에게 ‘커피빌런’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들이다.

빌런이라는 말이 이렇듯 일상화되고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정당성을 확보한 빌런이 환호와 찬사를 받으면서, 한편으로 우리는 빌런이 보여주는 집착이나 돌출행동, 혹은 가치의 전도들에 점차 무뎌지는 듯도 하다. 지속적으로 있었지만 더욱 심각한 형태로 일어나고 있는 아동학대 사건들도 이런 빌런적 특성을 보인다. 가정이나 유치원 등에서 일어나는 아동학대는 이미 한 가정이나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이 집 안에서는 안전하다고 하더라도 집 밖에서는 폭력에 노출돼 있다. 심지어 집 밖보다 집 안이 더욱 위태로운 아이들도 많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일상적인 일이 됐다. 지나면 잊히고 방치돼서 결국은 되풀이되는 이야기가 된 것이다.

물론 자신의 아이들을 거부하고 포기하고 버리고 학대하는 경악스러운 부모빌런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의 자녀를 위해서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역겨운 부모빌런도 수없이 많다. 또한 남의 아이들이 당하는 고통은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끔찍한 빌런도 수두룩하다. 모두 자신들만의 세상에 울타리를 치는 자들이고, 그것이 그들이 빌런인 이유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없다면, 우리 자신도 살 수 없다. 제대로 된 생명을 공급받지 못한 아이들이 어떻게 건강한 생명을 나누는 어른이 될 수 있겠는가. 건강한 생명이 결핍된 구성원들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정상적인 공동체가 되겠는가.

한 아이를 두고 서로 자신의 아이라 주장하는 두 여자에 대한 솔로몬의 판결은 유명하다. 솔로몬이 칼을 가져다 아이를 반반씩 나누어 두 여자에게 주라고 명하자, 한 여자는 이를 찬성하고 다른 여자는 반대한다. 솔로몬의 지혜는 아이의 생명을 살리려는 마음을 근거로 어머니를 가려낸다. 아이를 살리려는 자가 어머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기준이다. 그러나 어떻게, 누가, 누구의 아이를 살릴 것인가. 이제는 진정으로 ‘우리’의 아이들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할 때이다.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리’ 아이들 모두를 살리는 방법이 있지 않겠는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옛말은 오늘날 가장 필요한 지혜인 듯하다. ‘내’ 아이라고 ‘나’ 혼자 키울 수 없다. 도움이 필요하다. 혈연과 상관없이, 우리들의 아이를 살려야 하는 의무와 사랑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솔로몬은 혈연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를 직시한다. 솔로몬은 아이를 살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만을 보았다. 솔로몬의 지혜는 단지 아이의 어머니를 찾는 데 있지 않고 아이를 살게 하는 데 있다. 솔로몬의 재판으로 진짜 어머니를 찾는 일에만 골몰한다면 혈연의 배타성과 이기성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솔로몬의 재판은 ‘아이를 살려야 한다’는 단순하고 명쾌한 명제 앞에 우리를 불러 모은다. 그것은 혈연관계를 넘어서 우리 모두가 함께 우리의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 빌런 없는 세상에서 우리의 아이들이 행복해지고 우리 모두가 건강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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