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배기사 지지’ vs ‘갑질 아니거든’… 갈라지는 입주자들

뚜렷한 합의 없이 집 앞 배송 재개
“일방적 갑질 낙인” 주민들도 상처
일각 “노조, 기사·입주민 분열 조장”

연합뉴스

가구별 택배 배송 중단 사태가 빚어졌던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A아파트는 18일 비교적 조용했다. 800여개나 쌓여 있던 택배 상자들은 주인을 찾아갔고, ‘20㎞ 넘는 손수레 배송, 살인적인 노동입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택배노조의 현수막만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다. 입주민들의 빗발치는 항의에 ‘집 앞 배송’이 재개됐고 택배노조가 일시적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앞서 이 아파트가 안전사고 및 시설물 훼손을 이유로 지난 1일부터 택배 차량의 지상도로 통행을 막자 택배노조는 이튿날 집 앞 택배 배송을 거부했다. 집 앞 배송 중단 이후 해당 단지를 담당하는 택배기사들은 일부 입주민으로부터 모욕, 조롱, 협박 등에 시달린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주민은 새벽 시간까지 “왜 택배를 가져다주지 않느냐”며 수차례 문자를 보내고 ‘물품이 분실될 경우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는 게 택배노조의 설명이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몇몇 기사들은 정신적 피해를 호소하며 택배 일을 그만두는 것도 고민하고 있는 상태다.

택배노조 관계자는 “이번 사태가 마무리되더라도 매일 해당 단지의 주민들을 만나야 하는 택배기사들로서는 큰 부담을 느꼈을 것”이라며 “조합원 보호를 위해 가구별 배송 중단 조치를 일시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해당 단지에서 일하는 택배 기사 중 일부 기사만 시위에 참여했던 것도 배송 재개에 영향을 미쳤다. 택배노조에 따르면 대다수의 택배 기사들은 개별 사업자로 택배사와 계약을 맺고 있어 택배노조에 가입돼 있지 않다. 택배노조 가입률은 약 10% 수준이어서 시위에 참여하지 않고 배송을 이어간 택배기사들이 더 많다는 것이다. 앞으로 택배노조 측은 주민들과 직접 ‘배송 갈등’을 빚는 대신 농성을 통해 항의 표시를 한다는 계획이다.

택배차량의 지상도로 진입을 금지한 서울 강동구 고덕동의 한 아파트와 갈등을 빚고 있는 택배기사들이 일부 아파트 입주민들로부터 받은 음료수와 격려 문자. 전국택배노동조합 제공

집 앞 배송 재개로 택배 대란 사태는 일단 봉합되는 모습이지만 이 문제를 바라보는 입주민들의 입장은 엇갈린다. 이날 만난 입주민 이모(50)씨는 “택배기사들의 시위를 지지한다”며 “그분들 덕에 편리하게 생활하는 데 이렇게 갈등이 깊어진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어 “비슷한 문제를 겪는 다른 공원형 아파트의 경우 아이들 등교 시간 이후로 택배 차량을 이동하기로 하는 등 원만히 합의한 사례도 많다”고 덧붙였다.

반면 ‘택배 갈등’으로 아파트에 비난이 집중되는 상황을 불편해 하는 입주민들도 많았다. 일부 주민은 ‘갑질 주민’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김모(46)씨는 “입주민들이 평소 택배 기사한테 감사한 마음을 표현해왔고,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며 “아파트 지하도로 진입을 위한 저상차량 개조 논의도 택배사와 진행한 것으로 아는데 노조가 개입하면서 기사들과 입주민들 사이 분열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유모(37)씨는 “택배 기사분들을 딱하게 생각하는 건 입주민들도 마찬가지”라면서도 “일방적으로 입주민들을 ‘갑질 주민’으로 묘사해 프레임을 씌우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지난 15일 오후 서울 강동구 고덕동 한 아파트 단지 내로 택배 물품이 손수레에 실려 들어가고 있다. 뉴시스

아파트 내부에서는 입주자대표회의가 주민 의견을 충분히 듣지 않고 택배차량의 지상 통행을 금지한 것과 관련해 “주민 투표를 진행해야 한다”는 요구도 나오고 있다. 아파트 입구부터 손수레를 이용해 개별 세대 배송을 하게 되면 추가 근로가 발생하는 만큼 수수료를 올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이에 대해 노조 중앙집행위원회는 전날 회의를 열고 수수료 인상 방안을 논의했지만 결론을 내지 못했다. 노조는 19일 아파트 인근에 설치할 예정인 촛불시위 농성장에 입주민들이 의견을 개진할 수 있도록 게시판을 두는 것을 검토 중이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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