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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포템킨 마을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고전소설을 읽을 때 드는 의문 가운데 하나는 사건에 참여하는 인물들의 내면이 거의 표현되지 않는 점이다. 인물이 어떤 동기로 그 행동을 하는지, 그런 처지가 됐을 때 어떤 감정인지 잘 서술되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동기나 감정을 짐작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하는 행동이나 말이 힌트가 된다.

소설이 자아의 수수께끼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밀란 쿤데라는 과거의 작가들이 등장인물의 행동을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표현하려 했다고 말한다. 예컨대 ‘데카메론’의 작가 보카치오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인물의 행동과 모험뿐이지만, 그 행동만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그 인물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행위자의 일차적 의도는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 보이려는 것’이라는 단테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행동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초상화로 이해되었지요.”(‘소설의 기술’)

그러나 행동으로 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릴 수 없다는 것,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은 이제 대중화된 심리학을 통해 누구에게나 알려진 사실이다. 사람은 마음에 없는 말을 하기도 하고 의도와 다른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겉으로 나타난 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과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현대소설이 인물의 내면과 심리 묘사에 공을 들이게 된 이유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는 무슨 일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왜 했느냐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가 러시아를 통치하던 시절에 이 여제의 연인이기도 했던 그레고리 포템킨 총독은 크림반도를 정복했다. 예카테리나가 그 지역을 순방하려 하자 포템킨은 여제의 환심을 사기 위해 점령지에 가짜 마을을 만들어 군사훈련 쇼를 보여주었다. 다음 순방지에도 역시 가짜 마을을 급히 조성해서 낙후된 그 지역 실상을 보지 못하게 했다. 실제를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 가짜를 보여줬다. 장식과 위장은 인간의 재능에 속한다. 우리는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 꾸민다. 어떤 보여주기는 보여주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비롯한다. 보여주지 않으려고 보여준다. 진짜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 가짜를 보여준다. 누추함을 감추기 위해 화려함을 치장한다. 어떤 보여주기는 은폐의 수단이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포템킨의 가짜 마을과 같다고 할 수는 없다. 겉으로 표현된 대부분의 행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이나 의도가 표출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지적 생명체이고, 수없이 많은 외적 또는 내적 요인들에 의해 작동하는 매우 복잡한 유기체이므로 행동을 유발한 진짜 동기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것은 가짜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그리고 자기도 모르게 가짜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하다. 예컨대 사람은 이해타산에 따라 마음에 없는 말을 하거나 지킬 뜻이 없는 약속을 하기도 하니까. 토끼를 잡으려는 속셈을 감추기 위해 뱀을 잡아야 한다는 당위의 깃발을 들거나, 자기는 하지도 않고 할 마음도 없는 어떤 일을 목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니까. 마음에 없는 사과를 했다면 그 사람은 사과를 한 것이 아니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혹은 숨기고) 마음에 없는 사과를 한 것이다.

성직자나 정치 지도자와 같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요구는 더 필요한 것 같다. 그들이 타인을 위해 혹은 대의를 위해 하는, 의심의 여지 없이 좋은 일이 혹은 그 좋은 일을 통해 자기 이름을 높이거나 사적 이익을 얻으려는 불순한 동기의 조종을 받아 행해지고 있지는 않은지 살피는 일. 타인이나 대의를 위한 그 좋은 일을 자신의 출세 혹은 떳떳하지 않은 다른 목적을 위해 하고 있다면 그 타인이나 대의는 일종의 인질이 되고 만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에는 이런 정도의 엄격한 자기 검열이 함의돼 있다고 생각한다.

이승우 (조선대 교수·문예창작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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