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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나사로의 두 번째 장례식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


우리는 나사로의 첫 번째 장례에 관해서는 자세하게 알고 있지만, 두 번째 장례에 관해선 아는 바가 거의 없을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해 생각조차 해보지 않은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나사로가 살아나서 무덤에서 걸어 나왔지만, 얼마 후에 죽음을 다시 맞이했다는 것이다. 나사로가 혹시 순교했다 할지라도 누군가는 나사로의 두 번째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이 장례식은 분명히 분위기가 많이 달랐을 것이다. 비통함과 원망보다는 평안과 감사와 소망이 가득했을 것이다. 기적이 또 일어나서 나사로가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나사로와 그 가족에게 주신 선물은 몇 년의 연장된 수명이 아니고, 생명은 육체의 목숨에 달려 있지 않고 생명을 지으신 하나님께 달려 있다는 깨달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사로는 죽음을 넘어서는 경험을 몸소 체험함으로써 그 이후에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죽음을 넘어서는 생각과 행동을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사로처럼 죽었다가 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못했다고 그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긴다면 요한복음에서 나사로 부활 이야기는 예수 부활 이야기의 예고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수를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는 경험을 했고, 부활을 통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나사로보다도 더욱 명확하게 육체적 죽음이 모든 것의 의미를 정하는 잣대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밝힌다.

지난주에 필자가 속한 대학의 현직 교수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주위 만류에도 불구하고 바쁜 보직을 맡아 학교 발전을 위해 열심을 내고, 학생들을 사랑하고, 학과를 위해 헌신하셨던 분이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서 주위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다. 그러나 이분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딱하게 여겨야 할 대상은 고인이 아니라 살아있는 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 대부분은 아직도 마치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살고 있지만, 이분은 어느 순간 이 땅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고 늘 죽음을 대비하며 살아왔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서인지 매 순간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웃음과 미소로 긍정적 에너지를 퍼뜨리며 하루하루를 살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루라도 더 살아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유지하고 싶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치료를 받으셨다.

그러나 이 땅에서 더 오래 사는 것 자체가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마지막 시간이 왔을 때 육체의 죽음을 기꺼이 맞이하며 남은 사람들에게 “나름 알차고 행복하게 잘 살다가 좋은 날에 하나님 품으로 갑니다. 함께해서 고마웠습니다. 사랑합니다. 행복하세요”라는 감사와 사랑의 뜻을 전하며 인생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면서 세상을 떠났다. 이분은 유산 일부와 조의금을 장학기금으로 기부했는데 앞으로 수많은 후학들이 사랑의 혜택을 받으며 이분이 남긴 일을 계속해 나가게 될 것이니, 이분은 죽음의 경계를 초월해 사는 셈이다.

최근에는 필자와 아주 가까운 분이 하늘나라로 가셨다. 1928년에 태어나 한국 근현대사의 풍파를 다 겪으면서 일생을 살아온 이분은 아무리 파고가 높다 하더라도 이를 외면하거나 피하지 않고 목숨까지도 내놓을 각오로 온몸으로 맞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오셨다. 이분이 이런 생애를 살 수 있었던 힘은 선교사가 세운 중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신앙 교육에서 나왔다. 이 땅에서 가장 보람 있게 사는 비결은 나사로처럼 우리가 한 번 죽음을 경험했다고 생각하고, 육체의 죽음을 초월하는 생각과 실천으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이대성 연세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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