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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리어 왕’과 ‘더 파더’에게는 딸이 있었다

최여정 문화평론가


‘내 모든 잎사귀가 다 지는 것 같아.’ 앤서니 홉킨스의 빛바랜 눈동자에 눈물이 가득 고인다. 짙은 주름 속에 가리워진 그의 눈빛 속에는 엄마를 향해 뛰어가는 소년의 안도감이,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는 청년의 황홀함이, 그리고 생의 마지막을 향하는 노인의 두려움이 모두 담겨 있다. 한 남자의 인생이 스쳐 지나간다. 카메라는 요양원 작은 방의 창밖으로 향하고, 커다란 나무의 싱그러운 초록잎들이 부드러운 바람에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영화 ‘더 파더’를 보고 나오니 사방은 봄빛으로 눈부시다. 산이며 들이며 와와하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통에 마음 한켠이 울렁거릴 지경이다. 부지런히 새순을 밀어 올리는 그 놀라운 생명력에 경이로워지면서도 또 한편 밀려오는 쓸쓸함. 그 풍요롭고 아름다웠던 나뭇잎들이 하나둘 떨어져 나갈 때 닥쳐올 고독과 외로움을 이제는 알 것 같기 때문이다.

‘더 파더’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플로리앙 젤레르의 동명 희곡이 원작이다. 2012년 초연 이후 몰리에르 작품상을 비롯해 토니상과 올리비에상까지 석권하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016년 한국에서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공연됐는데, 40년 만에 무대에 선 박근형의 연기가 오래도록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이야기는 단출하다.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아버지, 그의 곁에서 아버지의 기억을 붙잡으려는 딸. 자신이 치매를 앓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는 딸의 보살핌을 거부하면서 점점 더 괴팍해져만 간다. 하지만 그는 결국 무너진다. 수도 없이 변주되는 가족 비극의 전형이지만, 한 인간이 맞는 육체적·정신적 소멸을 이토록 두렵고도 아름답게 그린 작품이 또 있을까.

또 한 명의 슬픈 아버지가 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 잘 알고 있듯이, 리어 왕은 세 딸에게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로 표현하라고 하는 어리석은 주인공이다. 그 결과는 너무나도 비극적이어서 리어 왕도 그의 세 딸도 모두 죽음을 맞이한다. 400년이 넘는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리어 왕을 관통하는 코드는 80살 넘은 노왕의 광기가 초래하는 생의 불행한 결말이다. 그 광기는 아주 쉽게 치매로 연결된다. 하지만 나는 노왕의 육체적 쇠약함과 통제권 상실에서 오는 정신적 혼란을 들여다보게 된다. 한때 그는 한 국가를 통치하던 오만한 왕이었고, 세 딸과 사위에게 받을 존경과 사랑은 그저 당연하다 여겼다. 그러니 이 모든 것을 잃은 순간 어느 누구라도 광야를 미친 듯 헤매지 않을까. 하지만 그는 한 사람으로 인해 구원받는다. 그가 내친 막내딸 코델리아는 끝까지 아버지를 지킨다. 늙은 왕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싸늘한 딸의 시체를 품에 안고 숨을 거둔다.

지난겨울부터 부모님과 한집에 살고 있다. 십년도 넘게 떨어져 지냈는데 가능한 일일까? 매일 밤 수십 가지의 가상 시나리오를 썼다가 지우기를 반복했지만 더 늦기 전에,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 부모님 곁에 있기로 했다. 남동생은 대단하다는 한마디가 전부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보기 좋게 내 예측을 비껴갔다. 매일 아침 문안인사를 드리고, 퇴근길에 두 분 좋아하는 단감 한 봉지 사와서 깎아 드리며 도란도란 하는 일은 TV 드라마에나 나올 장면이었다. 뒤늦게 서로 깨달은 건, 나이든 부모는 더 이상 예전처럼 마흔이 넘은 딸을 통제할 수 없고, 나는 이미 부모 곁을 떠나 만든 내 식의 생활을 쉽게 바꾸지 못하리라는 것을.

일찍이 우리는 부모에게서 돌봄을 받는다. 이제는 그들이 나의 돌봄을 필요로 한다. 부모가 내게, 그리고 이제는 내가 부모에게 나눠줄 생의 순환 고리. 그 역전의 순간을 서로가 인정해야 한다. 집 앞 가까운 마트도 내가 운전해 모셔다 드려야 하고, 인터넷뱅킹 하실 때마다 꼭 한 번은 내 이름이 큰 소리로 불리지만 싫지 않다. 오늘 아침에도 싱크대 물기 하나 닦을 줄 모른다며 잔소리가 날아온다. 그래도 하나씩 떨어지는 늙은 부모님의 잎사귀를 지켜보는 일, 그 낙엽 하나 주워 내 마음의 책갈피에 꽂아 두는 일, 그거면 됐다. 다 됐다.

최여정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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