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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제노사이드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봄은 마냥 부드럽고 섬세한 계절만은 아니다. 야누스의 계절인 봄에는 에로스와 타나토스 충동의 상반된 이중성이 들어 있다. 봄날 속에는 날카로움과 부드러움, 탄력과 이완, 불과 얼음, 탄생과 죽음, 활력과 게으름 등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들어 있다. 시인 이장희의 시 구절처럼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 고운 향기가 어리우지만 동시에 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 미친 불길이 흐르는 것’이 봄이다. 봄은 마음만 훔치고 몸은 멀리하는 여인처럼 애간장을 태우는, 가깝고도 먼 존재이다.

봄비가 다녀가면 긴 겨울 내내 침묵 속에서 사유를 우려내던 초목들이 자연의 키보드 앞에 앉아 시문(詩文)을 쳐대기 시작한다. 반짝반짝 새롭게 태어나 생동하는 초록 문장들이 산과 들의 지면(地面)을 가득 채운다. 새로운 뜻으로 충만되는, 지상에서 가장 깨끗한 문자들의 행렬을 벅차게 읽노라면 비 다녀간 산길처럼 마음이 시원하게 열린다. 시골 오일장 좌판에는 벌써 연초록 신간들이 초록 향기를 풍기며 수북하게 쏟아져 나와 있을 것이다. 숨은 신이 햇살과 바람과 비와 구름을 필기도구 삼아 일필휘지로 토지(土紙)에 휘갈겨 쓴 푸른 책들! 일찍이 마르틴 하이데거가 진술한 바처럼 존재(神)는 존재자들(자연 사물들)을 시켜 저렇듯 당신 자신을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하늘(神)이 쓴 천문(天文)을 두근두근 숨차게 호흡하면서 일상이 입힌 영혼의 얼룩을 지운다.

봄밤이다. 낮을 관장하던 시각의 문이 닫히고 밤을 위한 청각의 문이 열리고 있다. 내 몸의 기관은 온갖 사물이 내는 소리들과 냄새들을 빨아들인다. 공기 속에서는 누룩 익는 향내가 난다. 이스트를 넣은 양 대지는 부풀어 올라 몰캉몰캉 감정을 반죽하기에 좋다. 바야흐로 감각의 향연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날이 밝아오면 봄은 삼동 내 지속됐던 파업을 끝내고 엽록소 공장을 다시 가동시킨다. ‘우리 인간은 식물에게서 탄수화물을 훔쳐 에너지로 삼고 호흡 과정에서 배출한 이산화탄소는 식물에게 흡수돼 탄수화물 합성에 재활용된다. 그리고 이 위대한 순환 작용은 1억5000만 킬로미터 떨어진 태양에서 오는 빛 때문에 가능하다. 자연의 협업이 참으로 놀랍다.’(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부분)

봄볕을 쬐거나 껴입고 있으면 몸속에 사는 열 살 어린아이가 밖으로 튀어나와 동요를 부르며 칭얼대기도 한다. 용돈을 아껴 산 호루라기를 시도 때도 없이 불고 다녔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호루라기를 불면 염소는 풀을 뜯다 말고 꽃처럼 예쁜 뿔을 흔들어 푸른 울음을 허공에 뱉어냈고 냇물은 햇살을 튕겨 은빛으로 반짝였다. 또, 가지 밖으로 얼굴을 내민 연초록들은 바람에 그네를 타며 하얗게 나부끼고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넘나들던 새들의 음표가 한 옥타브 높아지곤 했다.

그런데 이렇듯 장엄하도록 몽롱한 봄날의 이면은 어떠한가? 내가 조석으로 거니는 도심의 길가 잡풀들은 봄이 오면 잔인한 폭력에 노출돼 실로 형언키 어려운 고통을 치러내야 한다. 이주해온 유럽인들의 힘의 강제에 의해 누대에 걸쳐 살아왔던 터전에서 내쫓겨야 했던 인디언의 가혹한 운명처럼 잡풀들도 자신들이 살아왔던 터전에서 뿌리째 뽑혀 내동댕이쳐지는 수난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잡풀이 뽑힌 그 자리에 사람들은 꽃을 심는다.

꽃과 잡풀 간 가치와 의미의 서열은 누가 매겨온 것인가? 이는 사물을 타자로 규정해온 인간 중심의 사고가 가져온 횡포가 아닐 수 없다. 꽃모종에 바쁜 아낙들 중에는 오래전 산동네에서 원주민으로 살다가 이주민들에게 내쫓김을 당한 이도 있을지 모른다. 나는 까닭 없이 잡풀들에게 측은지심과 함께 죄의식을 느낀다. 그들에게 봄은 잿빛 죽음의 계절이다. 제노사이드란 인간 세상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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