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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재산비례벌금제

이흥우 논설위원


속도 위반으로 억대의 범칙금이나 과태료가 부과된다면 당장 청와대 청원게시판이 난리 날 거다. 부과돼 봐야 대개 가장 낮은 단계인 3만원(범칙금), 4만원(과태료)이다. 폭주족이 아닌 다음에야 최고 단계인 12만원, 13만원을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아무리 과속을 해도 범칙금 12만원, 과태료 13만원을 납부하면 뒤탈이 없다.

그런데 속도 위반했다고 실제로 억대 벌금을 낸 사람이 있다. 물론 우리나라 사례는 아니다. 핀란드에서 있었던 일이다. 몇 해 전 노키아 부사장은 시속 50㎞ 구간에서 75㎞로 달렸다가 11만6000 유로(약 1억6000만원), 육가공식품업체 상속자는 시속 40㎞ 구간에서 80㎞로 주행하다 17만 유로(2억2800만원)의 벌금을 각각 얻아맞았다. 재산비례벌금제를 시행하고 있어 가능한 일이다. 동일한 범죄를 저질렀어도 재산의 과다에 따라 벌금을 차등 부과하는 이 제도는 1921년 핀란드가 세계 최초로 도입한 이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에서 시행 중이다. 영국은 92년 도입했다가 6개월 만에 폐지했다.

범칙금 10만원은 하루 벌어 하루 살아가는 소시민에겐 상당한 부담이다. 그러나 부자에겐 찰나의 기회비용에도 못 미쳐 10만원으론 사실상 징벌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부자에게도 소시민의 10만원에 해당하는 부담을 지워 범죄를 줄여보자는 게 이 제도의 취지다. 우리나라에서도 92년부터 진보, 보수 정권에 상관 없이 여러 차례 논의됐으나 실행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소득과 재산 파악이 어렵고, 동일 범죄에 대한 차등 처벌이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형법 등 대대적인 법 개정도 이뤄져야 한다.

‘이슈메이커’ 이재명 경기도지사의 제안으로 재산비례벌금제가 다시 쟁점으로 떠올랐다. 논의할 가치는 충분하다. 그때와 지금의 상황, 여건이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초점이 돼야 할 텐데 본질과 동떨어진 독해력 공방으로 흐르고 있다. 배가 산으로 가고 있으니 이번에도 변죽만 울리다 말 듯하다.

이흥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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