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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마음껏 떠드는 즐거움

심희정 온라인뉴스부 기자


배우 윤여정의 오스카상 수상 소식을 누구보다 즐겁게 축하한 건 그의 사적 모임 ‘지풍년’이었다. 윤여정이 좋아하는, 윤여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만나 수다를 떠는 모임은 8년째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윤여정은 그들이 떠드는 모습을 보다가 “지X도 풍년”이라고 했고, 이 말은 모임의 이름 ‘지풍년’이 됐다.

어쩌면 윤여정이 70대답지 않다는 평가는 지풍년 같은 그의 다양한 주변인들이 만든 것일지 모른다. 지풍년은 40~70대의 영화감독, 교수, 전직 기자, 건축가 등 직업부터 나이까지 참 다채롭다. 다양한 영역의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생각을 듣는 건 아무래도 나이 같은 건 초월하게 되는 일인 것 같다. “나는 재밌는 사람만 만나”라고 말하는 그에게 나이가 뭐 중요하겠는가.

그는 앎을 자랑하는 보통의 어른들과는 좀 다르다. 무대 중앙에서 물러나는 법을 모르거나 두려워하는 과거의 영웅들과도 많이 다르다. “내가 처음 살아보는 거잖아. 나 67살이 처음이야.” “배우로서의 삶은 때로는 주연이고 조연이고 단역일 때가 있다. 인생이란 긴 과정에서 순서처럼 오는 것 같다.” “어른이라고 해서 꼭 배울 게 있느냐?” 그의 어록은 이토록 담담하다.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바쁜 나날을 보냈을 테니 지풍년은 꽤 오래 모임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코로나19로 5인 이상 사적 모임이 금지됐으니 지풍년이라고 달리 방법이 있었을 리 만무하다. 중단은 아니지만 잠정보류 상태이리라. 윤여정이 오스카 여우조연상 최종 후보로 지명됐을 때 그는 캐나다에서 드라마 촬영을 마치고 귀국해 자가격리 중이었다. 그는 홀로 축하주를 마시며 수화기 너머 그리운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을 테다.

지난해 12월 말부터 시작된 5인 이상 집합금지 조치는 벌써 해를 넘겨 다섯 달째 이어지고 있다. 5명이 넘어가는 모임은 봄으로 만남을 미뤘다가 여름으로 한 번 더 유예해야 했다. 애초 인원이 5명, 6명인 모임은 ‘쪼개서 만나자’고 하기도 겸연쩍다. 누군가를 일부러 배제하거나 누군가는 양보해야 하고, 언제 올지 모르는 다음을 하염없이 기다려야 해서다. 그러느니 차라리 맘 편히 다 같이 볼 날을 기다리자고 다짐했더니 5월도 5인 이상 만나기는 틀린 것 같다.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노상에서 밤새 떠들었던 시절들이 스친다. 그런 기억은 아주 먼 옛날 같다. 다음 날이면 기억도 못할 얘기들을 신나게 지껄였다. 그 새벽의 이야기는 누구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 부끄러움도 없었다. 복고 열풍을 두고는 왜 우리는 경험하지 못한 과거를 추억할까 궁금해했고, 제멋대로 올해의 영화나 최고의 배우 따위에 순위를 매겨보기도 했다.

마음껏 떠들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다른 세계에 와 있다. 당장의 밥벌이, 통장 속 잔액, 시퍼렇게 변한 주식 창 같은 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없다. 이야기한다는 것은 누군가의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경험이다. 한 사람의 세계를 탐험하다 보면 내 세계는 확장된다. 수다는 우리만의 책이나 영화,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이다. 윤여정이 “헛소리를 좋아한다. 낄낄거리는 것, 농담 잘하는 걸 좋아한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테다.

오해를 줄이는 데 대화만한 것도 없다. 상대방의 별 뜻 없는 행동, 말 한마디를 내 멋대로 곱씹다 보면 어느새 마음속 심해에서 허우적대기 마련이다. 서운한 마음이 부피를 키워가는 동안 이해하는 마음은 점점 비좁아진다. 몇 번 만나 떠들면 아무 일도 아니게 되는 미운 생각이 단단한 돌덩이가 돼 버린다. 그렇게 단절된 관계는 쉽게 돌아오지 않고, 한 사람이 떠난 자리만큼 내 세계는 작아진다. 손해를 감수한다는 뜻의 ‘손절’은 사람 간 관계에 쓰여선 안 될 말이다. 작아지고 옹졸해져만 가는 각자의 세계를 넓히는 데는 수다가 제일이다. 하찮은 수다의 순간들이 소중한 이유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말처럼 수다는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심희정 온라인뉴스부 기자 simcit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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