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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오랜만에 아내와 여행을 다녀왔다. 울산과 부산에서 연이틀 강연이 있어서 전후로 함께 바다를 즐겼다. 울산의 새벽 일출은 장엄했다. 전날에 비가 오고 날이 흐려 기대가 없었는데 새벽 5시에 벌써 동쪽 창문이 환하게 밝더니 바다 위 구름을 무찌르고 찬연히 떠올랐다. 어둠에서 빛이 일어서는 광경이 마음의 짙은 어둠도 물리쳐 주니 상서롭기 그지없었다.

태종대 바다는 파란 옥돌을 망망히 깐 것 같았다. 쏟아지는 햇빛 각도에 따라 변하고 구름 한 장만 하늘에 걸쳐도 달라졌다. 녹색이 몰려들어 녹청(綠靑)을 이루고, 파도에 씻겨 금세 연청(軟靑)을 내비쳤다. 빛 닿는 곳마다 청금(靑金)을 쏟아내고, 물고랑마다 감청(紺靑)이 끼어들었다. 때로 청색과 녹색의 합주곡 속에서 담청(淡靑)이 일어서서 눈을 가득 채웠다. 바다의 다채로운 파랑 속에서 울울한 마음이 말갛게 씻기는 듯했다.

바다는 인간을 구원한다. 막막한 수평을 바라보며 걷는 산책에서, 물결의 심연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응시에서 우리 부부는 코로나19 탓에 누적된 우울을 치유하고 가라앉은 정신을 위로받았으며 삶의 활력을 돌려받은 느낌이었다.

지난 한 해, 코로나19 탓에 삶은 벽에 갇혀 있었다. ‘재택’ ‘집콕’ ‘비대면’의 삶은 유동성을 잃었고, 눈은 멀리 보는 법을 망각했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어긋난다. 그렇다. 인류는 한없이 이동하면서 관계를 늘려가는 와중에 문명을 이룩하고 삶을 진화시켰기 때문이다.

호모 사피엔스는 무엇보다 ‘관계의 존재’다. 진화인류학의 연구 결과를 집약한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 카인드’(인플루엔셜)에 따르면 사피엔스(Sapiens)의 ‘슬기’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파악하는 이성의 힘보다는 숱한 어리석음과 끔찍한 탐욕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타자의 표정을 살피면서 속마음을 파악하고 처지를 헤아리는 정서적 힘을 가리킨다.

역지사지를 통해 더 나은 관계를 발명하는 능력이야말로 인류가 극도로 복잡한 상징 질서로 이루어진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면서 ‘지구의 정복자’가 되는 데 이바지했다. 따라서 인간 사회의 모델은 홀로 돌아다니면서 다른 인간과 먹이를 경쟁하는 고독한 사냥꾼의 집합이 아니라 큰 무리 안에서 태어난 후 어릴 때부터 서로 힘을 합치는 법을 익히고 같이 사냥해서 먹이를 나누는 자발적 협력자의 모임에 가깝다.

집콕은 인간다움의 근원을 파괴한다. 기성세대도 무척 힘들게 하나 특히 비대면으로 살아갈 만큼 충분한 사회관계를 맺지 못한 청년들을 우울과 죽음으로 몰아넣는다. 여러 집계 자료에 따르면 작년에 우울증 공황장애 등 정신질환으로 고통받는 20대 숫자가 가파르게 증가했으며 20대 자살시도자 역시 끔찍하게 늘었다. 어찌 보면 사회적 거리두기란 상대적으로 바이러스를 잘 견딜 수 있는 청년의 양보와 희생을 바탕 삼아 사회 전체의 건강을 지키는 일인 듯도 하다. 기성세대가 코로나19 극복 방안에 청년을 위한 사회적 프로그램을 따로 마련하지 않는다면 청년들 배신감이 커질 게 분명하다. 윗세대에 대한 청년의 돌봄은 잘 작동하는데 아랫세대에 대한 장년의 배려는 별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너무나 이상하지 않은가.

백신 덕분에 온갖 곳에서 포스트 코로나 이야기가 늘고 있다. 극도로 조심하는 짤막한 여행도 이토록 우리를 기쁘게 하는데 이동과 만남이 돌아오는 날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나 재난 도중 자기 삶을 더 많이 희생한 이들이 함께 기쁨을 느낄 수 없다면 포스트 코로나는 와도 오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 인류사는 인간을 고독한 사냥꾼으로 만드는 사회는 몰락하고, 자발적 협력자로 진화시키는 사회가 번영함을 보여준다. 포스트 코로나를 말할 때 무엇보다 청년, 여성, 자영업자 등 코로나 희생자들이 삶의 온전성을 회복하도록 우선 주력하면서 해방의 기쁨을 모두가 누릴 수 있게 애쓰는 마음이 필요하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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