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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풍경화] 어느 넉넉한 하루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집에서 편의점까지는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그 먼 거리를 어떻게 매일 왕복하느냐 주위에서 걱정하며 묻는데 요즘은 어쩌다 작가라는 새로운 직업이 추가돼 상당한 시간을 작업실(우리집 작은방)에 갇혀 지낼뿐더러 편의점을 오가는 시간이 결코 아깝지 않다.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오르는 일이 약간 번거롭긴 하지만 가는 길에 책 읽고 이런저런 생각 하다 보면 내겐 가장 소중한 시간이 된다. 나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일부러 긴 여정을 택한다.

요새는 집 앞에 진 치고 앉은 ‘사생팬’들 때문에 편의점에 가는 일이 살짝 버겁다. 문 열고 나서기만 해도 ‘꺄아아악, 오빠!’하면서 반갑다고 팔짝팔짝 뛴다.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거리가 500m쯤 되는데 그 구간에도 길게 줄지어 늘어서 ‘가지 마세요!’ 발목을 붙든다. 내 팬클럽은 어찌나 많은지, 철쭉, 개나리, 매화, 진달래, 목련, 민들레, 복사꽃… 무리 지어 피어나 ‘어딜 가시는지?’ 묻는다. 봄 햇살까지 합세해 나를 붙잡는다. 그냥 가시게? 여기 벤치에 좀 앉았다 가! 이렇게 소중하고 다정한 팬들을 놔두고 내가 어찌 허겁지겁 출근에만 전념한단 말인가.

어릴 적 학교 가던 거리도 1㎞가 채 되지 않았는데 그때도 사생팬이 많았다. 가는 길목에 오락실, 만화방, 문구점, 놀이터…. 쭈그리고 앉아 오락기 화면을 넋 놓고 구경하다가, 길거리 손수레에 걸린 커다란 거북선, 잉어 모양의 설탕 과자를 경탄하며 부러워하다가, 문구점 ‘뽑기’에 도전하며 50원쯤 탕진하다 보면 딩동댕 시작종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굣길도 그리 만만찮아 아침과 같은 유혹이 나를 붙잡고, 놀이터에서 그네 타다 시소에 올랐다 정글짐 몇 번 왔다갔다 하다 보면 어느새 울금색 노을이 깔렸다. 엄마에게 혼나는 것도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었지.

지금은 혼내는 사람도 없고, 빨리 오라 재촉하는 종소리도 없어 그러는가. 5분이면 닿을 수 있는 거리를 30분 넘게 걸린다. 노란 개나리 앞에 미소 짓고 있다가, 길섶에 핀 민들레에도 인사를 건넸다가, 이름 모르는 연분홍 꽃잎에 “네 이름은 뭐니?”하고 묻다가, 느티나무 가지 위에 돋아난 조그만 이파리를 한참 넋을 잃고 바라보다 버스를 몇 대 놓친다. 그렇게 편의점에 도착해 상품 진열하고, 창고 정리하고, 청소를 마친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엔 또 다른 팬클럽이 ‘그냥 갈 거야?’하면서 나를 애타게 부른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는 길목에 작은 빵집이 있다. 그냥 지나칠 리 없지. 단팥빵, 소보로, 소시지빵, 깨찰빵, 모카번 골고루 담는다. 아내가 좋아하는 500원짜리 생크림까지 추가한다. 이걸로 내일 아침 식사 준비 끝. 버스에서 내려 집에 가는 길에도 사생팬이 있다. 통닭집, 족발집, 분식집, 노점 트럭에서 파는 순대와 곱창까지 골고루 발목을 붙든다. 어제는 순대였으니 오늘은 통닭이 좋겠다. 방문 포장하면 1000원 할인해주는 프라이드치킨을 매콤한 맛으로 주문해놓고 지글지글 튀기는 냄새 맡으며 조용히 밤하늘을 바라본다. 반짝 별이 빛난다. 봄바람이 시원하다. 이만하면 넉넉한 하루 아닌가.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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