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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의 문화스케치] 기념하는 마음


5월은 기념일이 많다. 사전을 펼쳐 ‘기념하다’를 찾아보니 ‘어떤 뜻깊은 일이나 훌륭한 인물 등을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 마음에 간직하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거창한 업적을 달성했을 때나 사회적으로 널리 인정받은 사람만 기념해야 할 것 같다가도, 실은 우리에게 기념할 대상이 얼마나 많을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개인마다 뜻깊은 일은 다 다를 것이고 남들이 동경하지 않더라도 내게는 더없이 소중한 사람도 있을 테니 말이다.

기념하는 일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잊지 아니하고’라는 대목 같다. 시간은 많은 것을 희미하게 만든다. 생생한 기쁨도, 뼈아픈 슬픔도 세월이 흐르면 옅어지게 마련이다. ‘아, 그런 일이 있었지’나 ‘그때 정말 좋았는데’처럼 회상으로 그칠 때가 많다. 기억은 왜곡되거나 축소되면서 본래의 감정과 조금씩 멀어진다. 더구나 해마다 돌아오는 기념일에는 어떤 관성이 작용한다. 기념일에 으레 치러야 하는 의례와 마련해야 하는 선물을 떠올리면 좋은 감정만 생기지는 않는다. 마음에 간직하는 일이 권리라면 잊어버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일은 의무에 가깝기 때문이다.

5월에는 근로자의 날, 어린이날, 어버이날, 스승의 날, 성년의 날, 부처님 오신 날처럼 익숙한 기념일도 있지만 유권자의 날, 동학농민혁명 기념일, 5·18민주화운동 기념일, 부부의 날처럼 들어는 봤지만 크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은 기념일도 있다. 바다식목일, 식품 안전의 날, 발명의 날, 세계인의 날, 방재의 날, 바다의 날처럼 생경한 기념일도 있다.

그야말로 하루 걸러 기념일이 찾아오는 셈이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쉬는 날일지도 모를 날에, 또 다른 누군가는 종일 먹먹한 상태로 가슴을 부여잡을지도 모른다. 국가가 주도해 대대적으로 행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기념 행위는 기본적으로 개인의 의지에서 비롯하니 말이다.

일전에 나는 ‘1년’이라는 시에서 5월을 가리켜 이렇게 썼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기념일이 많다는 것은 축하할 일이 많다는 말도 되지만 나의 위치를 파악하는 냉정한 잣대가 되기도 한다. 단순히 축하받지 못한다는 아쉬움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스스로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는 소외감에 사로잡힌다.

지난 5월 1일은 지인의 생일이었다. 축하 인사를 건네니 이런 답변이 왔다. “노동절에 태어난 건 열심히 일하라는 운명이라고 다들 농담처럼 이야기해요.” 매년 그는 생일을 기념하기 전, 노동자로서의 자기 자신을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같은 날, 어버이날이 생일인 지인의 글을 읽었다. 어릴 때 그는 온전히 축하받고 싶은데 축하와 감사를 나누는 것이 좀 억울하게 느껴졌다고 썼다. 누구나 그랬을 것이다. 생일은 1년에 한 번 찾아온다. 어버이날 또한 1년에 단 하루다. 성인이 된 그는 축하를 받으면서 동시에 고마움을 표현할 수 있음이 얼마나 좋은지 깨달았다고 한다. 기념하는 마음은 동시다발적으로 피어오를 수 있다.

전주에 내려가면 아버지가 계신 추모관을 꼭 찾는다. 아버지의 유골과 가족사진이 담겨 있는 작은 공간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먹먹해지고 만다. 아버지는 생전에 바둑과 당구를 즐기셨는데, 바둑판과 당구대 미니어처를 구해 그 안에 넣어두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어서다. 잘 지내고 계시냐고 육성으로 전할 때마다 사진 속 아버지가 희미하게 웃는 것 같다. 이 희미함을 능동적으로 붙들기 위해서라도 기념해야 한다.

매년 기념일이 반복되면 새기는 일이 한 차례씩 늘어난다. 새기는 일이 반복되면 되새기는 일이 된다. 그날이 다가오면 몸과 마음이 자연스럽게 해당 대상을 떠올리는 상태로 변하는 것이다. 기억하는 일이 거듭되면 기념하는 일이 된다. 기념의 기는 벼리 기(紀)를 쓰기도 하고 기록할 기(記)를 쓰기도 하는데 어떤 것이든 기억을 기록하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나만의 방식으로 떠올리며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기념은 호의에서 발아한다. 어떤 대상을 좋게 생각하지 않으면, 기념은 귀찮은 일로 전락해 버린다. 그래서 나는 매일 기억한다. 매일 기념한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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