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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 판교 노동관계가 울산과 다르려면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판교 정보통신(IT)기업 젊은 화이트칼라 직장인들이 노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들은 주52시간 준수와 공정한 성과 배분을 고리로 노조를 만들고 조합원을 확대 중이다. 대부분 ‘~노조’라는 명칭보다 ‘~길드’나 ‘~리부트’같이 힙하고 핫한 동호회 성격의 이름을 내세우지만 협상에서는 단체행동을 주저하지 않는다. 민중가요를 틀어대는 집회나 거친 구호가 난무하는 플래카드를 멀리하지만 필요하다면 디자인을 바꾸고 동요를 틀면서더라도 자신들의 요구를 효율적으로 관철해낸다. 대부분 민주노총 계열 전국화학식품노조 소속이다.

MZ세대가 노동 의식을 갖고 행동에 나선 것은 문재인정부 들어서다. 이들의 행동주의가 문 정부의 노동에 대한 우호적 태도 때문인지 2017년 촛불집회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판교 테크 기업들에 노조가 들어서기 시작한 시기는 2018년 전후다. 이들은 오버하지 않으면서 실리는 확실히 챙기는 전략으로 기반을 다졌고 올해에는 카카오뱅크와 게임 기업으로 조직을 확장하는 중이다. 이런 흐름을 타고 국내 1세대 벤처기업인 한글과컴퓨터에서는 2004년 직원들의 외면으로 문을 닫았던 노조가 17년 만에 부활하기도 했다.

때 아닌 노조 바람 배경에는 디지털 경제의 급성장과 인력난 문제가 있다. 판교 지역은 울산을 대체하는 한국경제의 새로운 심장으로 떠오르며 20~30대 기술 인력을 끊임없이 빨아들이고 있다. 네이버와 카카오, 쿠팡 등은 대기업 집단에 편입되고 글로벌 플랫폼 기업으로 성장 중이다. 그러나 몸집에 비해 노동관계에 대한 감수성이나 인사관리 능력은 미약한 수준이어서 노조 확산의 단초가 됐을 것이다. 경영진의 안이한 판단도 작용했다. 첨단을 달리는 기술 기업에서 그것도 능력주의와 개인주의 문화에 익숙한 엘리트 집단에 기존 문법의 노조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은 판교의 창업자들이 젊고 노동에 열린 태도를 보임으로써 출발부터 노사 불신과 적대감을 쌓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 노조는 산별 조직인데 회사는 각개약진 체제다. 이들 기업의 특성상 노동 전담인력을 충분히 확보하거나 외부 경력자를 불러들여 해결하기도 어렵다. 그때그때 원칙 없이 대처하다 보면 회사는 노조에 끌려가며 갈등의 늪으로 빠져들 수 있다. 더구나 MZ세대의 행동주의는 판교에 한정되거나 일시적 유행으로 그칠 현상도 아니다. 현대자동차가 모빌리티 서비스 플랫폼 기업을 지향하듯이 팬데믹 시대 디지털 전환은 대세고 소프트웨어 기술 인력은 디지털 경제 주력군으로 생산직을 대체하고 있다. 이들의 행동주의는 이미 현대차 그룹이나 LG전자 등에서 기존의 생산직 노조와는 별도로 새 사무·연구직 노조를 꾸리는 것으로 진화 중이다.

재계도 판교 지역 노조 바람을 한국 노동관계 혁신 계기로 삼겠다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 기업별 각개약진이 아니라 경제단체가 적극 나서 디지털 경제의 노동관계 생태계를 새로 설계하는 데에 역량을 모아야 한다. 기존 노동시장은 기업별로 쪼개져 있고 노조와의 관계도 기업 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임금과 직무 데이터도 업종이나 직종, 지역 단위로 집적되고 표준화돼 있지 않다. 스타트업이나 영세 기업의 경우에는 제대로 된 임금 테이블도 없고 인사노무는 주먹구구 임기응변이 태반이다. 이를 답습한다면 울산 지역의 실패한 노사모델이 판교에도 재현될 수밖에 없다. 1500여 테크 기업들이 참여하고 마켓컬리의 김슬아 사장이 대표하는 코리아스타트업포럼(코스포)이라는 경제단체도 있지만 노사 문제에는 손도 대지 않는다. 소프트웨어산업협회는 대기업들의 외면으로 필요한 서비스를 제대로 제공하지 못한다.

코스포 또는 대한상의가 나서서 카카오 김범수처럼 멀리 보고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그는 구인난을 겪고 있는 인공지능(AI)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자신의 공익재단이 주도하는 교육기관을 설립하겠다고 나섰다. 경쟁사끼리 제로섬 스카우트 경쟁을 벌이기보다 아예 인재풀을 넓힘으로써 상생 협력을 유도하는 고단수(high road) 전략이다. 마찬가지로 경제단체 또는 업종협회가 나서서 임금과 직무 관련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기술숙련 자격과 경력관리 시스템부터 구축해야 한다. 그리고 한국 노동관계를 전혀 새롭게 설계하겠다고 나서야 한다. 디지털 경제의 생태계를 강화하는 선택만이 판교가 진정으로 한국경제의 새 심장으로 자라는 길이다.

최영기 (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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