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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집을 채운 ‘부적형 아이템’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비염 때문에 주기적으로 병원을 찾는다. 내 코의 기저에는 늘 콧물이 잔잔하게 깔려 있고, 모든 냄새가 구체성을 잃고 관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다가온 지 오랜 세월이 지났다. 딱히 알레르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코의 구조적 문제로 다스리며 사는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래서 대강 버티고 살다 증세가 심해질 적마다 약 처방을 받는데 근래 일교차에 민감해진 코가 유난을 떨어 모처럼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다.

철마다 찾는 병원인지라 낯익은 의사 선생님이 먼지 관리를 잘해라, 잘 때도 코를 차게 하지 마라 등 생활 속 주의사항을 전달하며 늘 그랬듯 알약 며칠치와 스프레이형 약제를 처방해줬다. 매일 꾸준히 뿌리라는 당부와 함께였다. 그때 문득 집에 많이 남아 있는 비염약 스프레이들이 떠올랐다. 언제나 뿌리는 둥 마는 둥 하다 어찌어찌 코가 흐느낌을 멈추면 처박아두기를 반복한 탓에 새것이나 다름없는 약병 두어 개가 서랍 안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공연히 쓰지도 않을 약을 늘릴 수 없어 나는 솔직히 말했다. 아직 덜 쓴 스프레이가 집에 많이 남았다고 말이다. 그러자 선생님은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몇 달 전에 처방해드린 게 아직 남았다고요? 꾸준히 썼으면 그럴 리가 없는데….” 그는 고개를 젓더니 지엄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환자분, 약은 부적이 아닙니다. 쥐고만 있다고 낫지 않아요.”

모진 꾸중이었지만 근사한 메타포였다. 묘한 문학적 꾸지람에 콧물 가득한 코로 컹컹 웃으며 돌아오는 길, 나는 부적이라는 말을 곱씹었다. 왜냐하면 내 집에 비염 스프레이 말고도 ‘부적형 아이템’들이 꽤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나의 거실에는 홈트레이닝을 위한 요가매트가 깔려 있는데 이 역시 건강을 기원하는 거대한 부적이다. 그저 운동에 대한 상징성만 있고 실제로 내가 그 위에 앉거나 서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언제라도 유연하고 탄탄한 몸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책장에 꽂힌 두껍고 난해한 인문학책도 수백 페이지의 부적이다. 읽겠다는 다짐만 숱하게 하고 프롤로그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지만 좀 더 지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는 기원이 담긴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선반을 채운 영양제들도 부적이다. 비타민, 미네랄, 유산균, 밀크시슬, 홍삼 등인데 몸 어딘가가 안 좋은 것 같다는 발작적 불안이 사무칠 때마다 한 통씩 사 모았다. 그래놓고 꾸준히 챙겨 먹지는 않아서 대부분 새것인데 거기 존재하는 것만으로 병마를 쫓는 기운을 뿜으니 부적으로서의 역할은 톡톡히 수행 중이다. 중고마켓에서 산 실내자전거는 부적을 넘어서 기복신앙적 조형물 또는 토템의 길에 들어섰다. 육중한 몸집으로 방 한편에 당당히 자리하고 있는데 페달이 돌아간 지는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하지만 노상 바라보며 언젠가는 운동을 할 나 자신을 기대한다. 평화를 기원하는 탑이나 희망을 상징하는 동상처럼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나의 건강을 소망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제 몫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처분할 의사는 없다.

농담처럼 썼지만 실은 반성하는 중이다. 나는 바로 얼마 전에도 부적형 소비를 했다. 마치 이것만 있으면 내일부터 조깅을 할 것 같아 산 레깅스나 국민적 투자 광풍에서 뒤처지는 기분이 들어 주문한 주식 가이드북 같은 것들 말이다. 잘 사용한다면 피가 되고 살이 됐을 품목들을 나는 그저 순간의 불안을 눙치는 용도로 구비한다. 그리고 소유했다는 사실만으로 마치 뭐라도 이룬 듯 가상의 성취감만 즐기고 치워버린다.

하지만 약도, 요가매트도, 인문학책도, 실내자전거도 쓰지도 않으면서 건강이, 부지런함이, 지성이, 어제와 다른 미래가 찾아오길 꿈꾸는 것은 일종의 망상일지 모른다. 그러니 이제 그들을 현실로 끌어와 좀 더 활용해야겠다. 엄연히 실용성을 가진 사물들을 더는 부적의, 상징의, 기복의 지위에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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