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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블시론] 저 낮은 곳을 향해 높은 곳으로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미혼모가 사라지고 있다. 미혼모 기관 직원과 출산전문가에게서 들은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다행스럽다는 생각보다 더 큰 쓰라림으로 다가온다. 이런 변화는 작년 말 대한민국 형법에서 낙태죄가 삭제된 이후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에서 태어나지 못한 사생아가 많아지는 것도 큰 슬픔이지만, 태아 상태에서 제거되는 수많은 생명의 소멸은 더 큰 아픔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보면 여성의 자유로운 선택을 가로막았던 낙태죄 조항이 수많은 사생아의 생명을 보호해온 셈이다. 여성 인권을 위해 싸우는 단체들은 여성 자유를 보호하기 위해 태아 생명을 보호하는 장치를 제거해 버린 격이다. 이들은 자신을 ‘폭력에 대항하는 여성들(Women Against Violence)’이라고 자인하고 있지만, 세상에 태어날 수 있었던 수많은 생명을 폭력으로 제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자초하고 말았다.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윤리적 기준이 갈등을 일으킬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여성의 자유를 지키고 양성평등을 위해 싸우는 것은 백번 옳은 것이다. 태아의 생명과 건강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도 백번 옳은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를 선택하기 위해 하나를 버리는 것은 아주 어리석어 보인다. 법으로 강제로 틀어막고 장벽을 쌓는 것도 할 짓은 아니다. 또 선동으로 공격하고 상대를 악마화하는 마타도어도 온당하지는 않다.

여기에 인권운동을 향해 주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이런 모순적 갈등 상황에서 모두를 포함하고 함께 만족할 수 있는 더 높은 차원의 기준과 원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사회를 만들어가기 위해 함께 받아들일 수 있는, 차원 높은 원칙들을 제시하는 일이 인권과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의 소명이다.

우선 어떤 이념을 절대화시키는 이데올로기는 위험하다. 자유도 평등도, 남성도 여성도, 자본주의도 공산주의도, 심지어 정의도 사랑도 하나가 절대화되고 나면 다른 한쪽에서는 망가지기 시작한다. “무엇을 아무리 얇게 베어낸다 해도, 거기에는 언제나 양면이 있다는 것을, 나는 배우고 있습니다.” 사하라 사막의 성자 샤를 드 푸코가 배웠던 진리는 무슨 일에나 양면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임신 지속에 대한 여성의 자유가 절대적으로 옳은 원칙이라 할지라도 그 이면에는 수많은 태아 생명의 소멸이 있고, 낙태 금지가 아무리 정의로운 법이라 할지라도 거기에는 수많은 여성의 고통스러운 희생과 좌절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어떻게 포용해 받아들이게 할 수 있을까. 하나의 원칙도 훼손되면 안 될 것이다. 둘 다 포기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켜내고 싶은 원칙일수록 그 이면에서 망가질 수 있는 원칙을 지켜줘야만 한다. 자유를 이루되 평등의 방식으로, 정의를 이루되 사랑의 방식으로, 저 낮은 곳을 향해 감으로써 높아지는 것처럼 말이다. 낙태 반대를 지켜내고 싶은 사람일수록 여성의 자유로운 삶을 지켜줘야 한다. 사회 전체가 그 아이와 부모를 보호하고 키워주는 방식으로 하면 어떨까? 이는 여성의 선택 권리를 지켜내고 싶은 사람일수록 자발적으로 용기를 내 태아의 생명을 지켜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선언했던 예수님은 율법 폐기론자가 돼 십자가에 달렸다. 그는 목숨을 버려 율법을 완성했는데, 율법으로 말미암아 훼손되는 사랑의 방식으로 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준다. 악인도 있고 의인도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다를 바 없다.

유장춘 (한동대 교수·상담심리사회복지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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