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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우리가 읽은 척한 책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구글 검색을 하다가 영국의 서점 워터스톤에서 이벤트 일환으로 꾸민 매대 사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실소하고 말았다. 스무 권가량의 도서를 디스플레이하며 ‘우리가 읽은 척한 책들(Books We Pretend We’ve Read)’이라는 제목을 큼지막하게 달아놓은 거다. 면면을 살피니 누구나 알 법한 고전으로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분노의 포도’처럼 대부분 수긍할 만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같은 경우는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재미난 작품이라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영국에서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도 고전으로 분류돼 명단에 포함된 것일 수 있겠구나 싶다.

그러고 보니 모 대학에서 100권씩이나 선정했다는 목록과 권위 있어 보이는 단체에서 가려 뽑았다는 책들로 가득 찬 목록을 받아들고 한숨을 내쉬며 숙제를 하고 시험을 치르고, 독후감을 쓰기 위해 이해도 되지 않는 해설을 열심히 베꼈던 날들이 떠오른다. 이탈리아 작가 이탈리 칼비노에 따르면 “고전이란 사람들이 보통 ‘나는 …를 다시 읽고 있어’라고 말하지, ‘나는 지금 …를 읽고 있어’라고는 결코 이야기하지 않는 책”이다. 이 문장에서 그는 ‘다시’를 ‘아직 읽지 않았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의 궁색함’을 드러내는 부사로 사용하고 있다. 특히 책깨나 읽었다는 사람일수록 ‘다시’를 자주 사용하는데 왜 그런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흥미로운 대목은 워터스톤의 이벤트를 목도한 방문객들 반응이 기대 이상으로 호의적이었다는 점이다. ‘맞아, 정말 그러네. 나만 읽은 척한 게 아니구나’ 하고 멋쩍게 웃으며 진열된 책을 자신의 SNS에 올린 사람들이 많았다. 동지가 이토록 수두룩하니 새삼스레 도전의식이 생긴다는 이들 덕분에 판매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소셜 미디어 사진을 마주한 독자들도, 마치 모래바람에 드러난 고대유적을 비로소 발견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트윗은 수천 번 공유됐고 댓글이 수십 개씩 달린 포스팅도 보인다. 워터스톤의 스태프가 뽑은 목록에서 몇 권이나 안 읽었는지 수줍게 고백하거나, ‘읽은 척 도서의 최강은 바로 이것’이라며 추가하고 싶은 책을 올리는 ‘자칭 전문가’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벌어진 까닭은 전적으로 유머러스하면서도 대담한 타이틀 덕분일 거라 생각한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읽지 않은 책에 대해 열띤 대화를 나누는 광경이라니. 해당 이벤트는 디테일을 달리해서 여러 서점에서 동시에 진행해도 재미있겠다. 지역별이나 세대별로 다른 목록을 보면 서로를 이해하는 데 조금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하지만 만약 ‘당신이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 20선’ 같은 식의 진부한 이름을 붙였다면 어땠을까. 살짝 고까워하거나 무심코 지나쳤을 게 분명하다. “쯧쯧, 너는 정말 먹을 줄 모르는구나. 소고기는 쌈장이 아니라 소금에 살짝 찍어 먹어야 제맛인데”라는 말보다 “그렇지, 소고기는 쌈장에 찍어 먹어도 맛있지만 소금에 살짝 찍어 먹어도 맛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더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까.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그동안 미스터리 소설이 이렇다느니 판타지가 저렇다느니 떠들어대곤 했던 나도, 몸담고 있는 업계의 고전이라 할 ‘반지의 제왕’을 읽지 않았다. 그런 주제에 모 주간지의 청탁을 받고 읽은 척 리뷰까지 썼다. 원작을 완벽하게 구현한 피터 잭슨의 영화를 몇 번이나 보고, 톨킨의 전기를 읽고, 촬영지였던 뉴질랜드 호비튼으로 투어까지 다녀오고 보니, 어느새 원작소설을 두 번쯤 읽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원고지 10매 정도는 가뿐히 쓸 수 있더라만.

실로 부끄러운 일이고 지금에 와서는 깊이 반성하지만, 이렇게 털어놓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며 조만간 책을 사서 꼭 읽어야겠다는 투지가 생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여러분도 이런저런 이유로 읽지 못한 채 읽은 척만 했던 책이 있다면 한 번쯤 들려주지 않겠습니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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