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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위험한 전세금

김현길 사회부 차장


세 모녀의 투기에 휘말린 세입자들은 하루아침에 전세금을 떼일 처지에 놓였다. 전세 계약 만료를 앞두고 세 모녀가 전세금을 못 주겠다고 통보할 때까지 위험을 알아차릴 순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계약 당시 근저당 설정 없이 깨끗했고, 전입신고 후 확정일자까지 받은 집에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 생각하긴 어려웠다.

국민일보가 지난 10~13일 ‘세 모녀 전세 투기단’과 관련 피해를 보도한 이후 피해자들은 세 모녀가 최대 500채가 넘는 임대주택을 등록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보도가 나간 후 이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제보도 잇따랐다. 그전까지 대부분 개별적 피해인 줄 알았지만 세 모녀를 중심에 둔 거대한 연결망이 보도 이후 새로 그려지고 있다.

세 모녀 세입자들에겐 날벼락 같은 일이지만 1~2년 사이 비슷한 피해가 언론에 연달아 보도되면서 관련 피해자와 피해액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임대사업자와 피해자의 이름만 다를 뿐 피해 양상은 유사하다. ‘갭’(매매가와 전세가 차이)이 거의 없는 신축 빌라(연립주택) 등을 전세를 끼고 대거 매입한 임대사업자들이 만기 도래 후 세입자들에게 ‘돌려줄 보증금이 없다’며 버틴다. 자기 돈을 거의 들이지 않고 수백채를 보유한 이들은 ‘집이 팔리면 보증금을 준다’거나 ‘보증금 대신 집을 인수하라’고 배짱을 부린다.

이들 악성 임대사업자로 인한 피해는 과거의 전세 피해와 질적으로 다르고 광범위하다. 임대사업자의 무모한 ‘갭 투기’처럼 보이지만 임대사업자, 건축주, 중개인 간의 은밀한 거래가 뒤에 있다는 지적도 피해자와 수사기관에서 나오고 있다. 보통 임대인 명의를 도용해 전세금을 빼돌리던 과거의 전세 사기와 비교하면 사기로 처벌하기도 쉽지 않다.

범죄와 부조리는 그 사회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와 자리 잡는다. 보증금 반환 능력도 없는 이들이 자기 자본 없이 수백채씩 집을 불려나가는 동안 별다른 제재는 없었다. 등록 임대사업자에 대한 혜택 강화도 이들의 주택 증가를 부채질했다. 악성 임대사업자들은 각종 세제 혜택이 포함된 임대주택 등록 활성화 방안이 나온 2017년을 기점으로 주택을 크게 늘렸다. 세 모녀 중 두 딸도 그해 임대사업자로 등록하고 2년 사이 주택을 524채까지 늘렸다.

현 정부 들어 악성 임대사업자로 인한 피해는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임대인이 전세금을 제때 반환하지 못해 보증기관이 대신 내준 전세금 사고액은 2017년 이후 급격히 늘었다. 일례로 2016년 34억원이던 주택도시보증공사의 전세금 사고액은 2020년 4682억원까지 크게 뛰었다. 다른 보증 기관 사고액, 보증보험 미가입으로 잡히지 않는 부분까지 헤아릴 경우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취임 4주년 기자간담회에서 “부동산만큼은 정부가 할 말이 없는 상황이 됐다”고 말했다. 1년6개월 전 “부동산은 자신 있다”고 한 자신의 말을 뒤집게 된 배경엔 수치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집값 상승이 있다. 그 집값 상승은 주로 수도권 아파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아파트 집값 상승에 시선이 쏠려 문제점을 들여다보는 사이 빌라촌 한쪽에선 전세금이 위태로워진 세입자들이 대거 발생했다. 이들이 마주한 현실은 훨씬 차갑다. 그때 ‘영끌’을 하지 않아 집값 상승의 수혜를 입지 못했다는 박탈감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혼부부, 사회 초년생, 청약을 기다리던 가장인 이들에게 2억원 안팎의 전세금은 전 재산이나 마찬가지다. 거기엔 은행에 갚아야 할 대출도 상당액 섞여 있다. 계약 만료를 눈앞에 두고 피해를 알게 될 이들은 앞으로도 계속 나올 것이다. 관련 대책을 서둘러야 하는 이유다.

김현길 사회부 차장 hg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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