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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백신 여행

남호철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외국에 가려면 통행증과 같은 여권이 필수적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이 여권만 있으면 됐다. 하지만 코로나19 시대에는 백신을 접종받았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백신 여권’이 절실하다. 이 때문에 여행을 위한 백신 여권을 받기 위해 백신을 맞으러 여행 가는 역설적인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 지금 나라마다 백신 확보 상황과 접종 속도가 다르다. 백신 접종이 일정 수준에 도달한 일부 국가는 일상에서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외국 여행객들을 받아들이겠다는 분위기지만 그렇지 못한 나라가 대다수다. 백신 부국과 빈국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

코로나19 하루 확진자가 5000명, 사망자가 800명을 넘을 정도로 심각했던 미국 뉴욕시가 무료로 백신 접종을 해주겠다며 여행객을 초대하고 있다. 타임스스퀘어·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브루클린 브릿지 공원 등 인기 여행지에 접종소를 마련하고, 접종자에게는 지하철 이용권뿐 아니라 동물원·식물원 입장권까지 준다고 한다. 몰디브도 외국인 여행객에게 백신을 무료 제공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백신을 이용해 여행객을 유치하고 경제 회복에도 속도를 내겠다는 구상이다.

이에 멕시코 캐나다 태국 등에서는 미국으로 백신 접종 원정을 나서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백신 여행’ 상품도 출시되고 있다. 지난 3∼4월 미국으로 가는 패키지 여행 상품을 판 멕시코 여행사의 고객 대부분이 백신을 맞으려는 사람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태국의 한 여행사가 내놓은 미국행 백신 여행 상품에도 예약이 대거 몰렸다고 한다.

백신 접종 속도가 잘 올라가지 않고 있는 국내에서도 이 같은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다. 국내의 백신 1차 접종자는 19일 0시 기준 375만9058명이다. 통계청의 2020년 12월 말 주민등록인구 5134만9116명 대비 7.3% 수준이다. 2차 누적 접종자는 118만281명으로 전 국민의 2.3%다. 사회 필수인력을 제외한 30세 미만의 백신 우선 접종이 힘든 상황에서 어학연수를 겸한 ‘청소년 원정 백신 접종’ 여행 상품이 등장하는가 하면 골프나 여행 목적으로 가면서 백신을 맞으려는 수요도 늘고 있다. 한 유학원은 어학연수 참가자를 모집하며 ‘화이자 또는 모더나 백신 접종을 도와주겠다’고 유혹했다.

한국 방역 당국은 미국행 백신 여행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는 입장이다. 미국에서 백신 접종 후 이상반응이 생기면 정부가 책임지지 않는다고 했다. 현재 국가 예방접종 계획에 의해 접종한 이후 발생한 피해에 대해선 감염병예방법(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등에 따라 피해 조사와 보상 절차를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의 접종은 한국이 아닌 미국 정부를 통한 예방접종이라는 설명이다. 더욱이 미국에서 백신 접종을 받은 사실을 한국에서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어 백신을 맞았더라도 자가격리 면제 등의 조치는 불가하다고 한다.

미국 등 해외에서 백신을 맞는 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긴 시간과 비용, 코로나19 감염 위험 등 감수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해외에서 1차를 맞았다고 국내에서 2차 접종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어서 1차 접종만 한 뒤 돌아올 수도 없다. 화이자를 맞는다면 해외에서 3주 간격의 1, 2차를 모두 맞고, 다녀온 뒤 2주 격리를 하면 5주 이상 기간이 필요한 셈이다.

미국행 백신 여행은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일부 부유층이 가능하다. 백신 여행이 코로나19가 만든 새로운 형태의 여행이란 평가도 받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갈 수 없다는 점에서 백신 양극화가 만든 ‘슬픈 현실’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백신의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우려스럽다.

남호철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hc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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