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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노년의 주제

김남중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서울 서소문 일우스페이스에서는 김두엽 할머니와 그의 아들 이현영 화가의 합동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김 할머니는 94세 현역 화가다. 학교를 못 다녔고 그림을 배운 적도 없다는 김 할머니는 83세 때의 어느 날 종이에 사과 하나를 그렸고, 이를 본 화가이자 막내아들인 현영씨의 칭찬에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김 할머니는 전남 광양의 집에서 택배 일 나간 막내아들을 기다리며 그림을 그렸다. 집, 가족, 어린 시절 추억, 꽃과 나무, 개, 닭 등이 그림 소재들이다. 아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그림을 그리던 김 할머니는 89세 때인 2016년에 생애 첫 전시회를 하게 됐고, 지금까지 열 차례 이상 전시회 초대를 받았다. 할머니의 그림을 사는 이들도 많다. 지난달엔 광양에 김 할머니의 갤러리가 생겼다. 이달 초 첫 책도 출간했다.

올해 70세인 박승철씨는 얼마 전 ‘한눈에 알아보는 우리 나무’라는 나무도감을 냈다. 두 권이 먼저 나왔고, 내년까지 8권으로 완간 예정이다. 구청에서 일하다 1998년 퇴직한 박씨는 남들처럼 등산을 다니다가 나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도감이나 인터넷을 통해 나무 공부를 하다가 답답함을 느낀 그는 직접 도감을 만들어 보자고 생각하고 나무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렇게 23년 동안 150만장 이상의 나무 사진을 찍어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었다. 그중 4만장을 골라 1500여종의 나무 정보를 담은 총 8권의 도감으로 묶어낸 것이다. 출판사 글항아리의 강성민 대표는 “이 정도로 광범위한 나무도감은 수십 년을 바쳐야 얻을 수 있는 결과물”이라면서 “전문가들도 하기 어려운 작업을 한 퇴직 공무원이 해냈다”고 말했다.

두 분의 이야기는 노년이라는 시간대에 숨어 있는 어떤 창조적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2013년 가을 일본의 한 지방도시에서 만난 노인들의 모습도 떠올랐다. 대학의 한 강의실에서 열린 한국 언론사 노조위원장들 초청 강연회 자리였다. 강의실은 빈 자리 하나 없이 꽉 찼다. 150여명이 참석했다고 하는데 50세 밑으로 보이는 사람은 5명도 찾기 어려웠다. 대부분이 백발이었다. 의료 보조기에 의지해서 오신 분도 있었다.

하지만 강연회 열기는 대단했다. 녹음하는 사람, 필기하는 사람, 사진 찍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주최 측 대표는 고운 할머니였다. 연녹색 정장에 회색 모자를 쓰고 맨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얘기를 들었다. 음향과 영상 기기를 담당하는 이는 적어도 65세는 돼 보이는 남성이었는데 각종 장비가 든 가방 5개를 들고 다니느라 와이셔츠가 다 젖었다. 강연 후 질문도 쏟아졌다. 손 드는 이들이 많았고, 진지한 질문들이 이어졌다. 행사는 3시간가량 이어졌다. 하지만 중간에 자리를 뜨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한국에서 간 우리들에게 그 장면은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지?

강연회가 끝나고 인근 중국집에서 주최 측이 준비한 저녁 자리가 이어졌다. 회장과 사무국장을 포함한 주최 측 서너 명과 이날 통역을 맡아준 재일교포 여성이 자리를 같이 했다. 그 자리에서 실례를 무릅쓰고 나이를 물었다. 회장은 95세, 사무국장은 75세라고 했다. 통역자도 75세라고 밝혔다. 우리 일행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이 노인들은 대체 어떤 사람들이지?

사무국장은 “일본의 노인들은 대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살아간다”면서 자신들은 ‘공영방송을 생각하는 모임’이라고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통역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머니의 주제는 뭔가요?” 그분은 자신의 테마는 연금제도라고 대답했다. 10년 넘게 연금제도를 공부하고 있고, 회원들과 조사차 외국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면서.

김남중 문화스포츠레저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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