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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번역가의 원고료 이야기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출판사에서는 세 종류의 저자와 연결돼 일한다. 국내 저자, 해외 저자, 번역가. 국내 저자는 설명이 따로 필요 없을 듯하다. 해외 저자는 접촉이 빈번하지 않지만 편집 과정에서 난해한 부분의 이해를 구하기 위해, 또는 번역서 홍보 영상이나 한국어판 독자를 위한 인사말 원고를 청탁할 때 그 존재감이 선명해진다. 번역가도 출판사에선 당연히 저자다. 제1의 저자인 해외 저자에 빗대어 제2의 저자로 불리며 책의 편집 방향 등에 관한 논의에 참여한다.

독자 중에는 언어권별로 신뢰하는 번역가를 따로 기억하며 그 영향력에 대해 서평을 남기기도 한다. 원서를 번역한 문장과 문체는 번역가마다 확연히 다르다. 번역은 문맥을 똑같이 이해했다고 하더라도 선택하는 말과 표현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창작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국내 저자는 책 정가의 10% 선에서 판매 인세를 받는 게 통례인데 번역가의 경우는 상황이 다르다. 해외 저자의 인세 몫과 나눠 정가 3∼7%의 판매 인세를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인세 아닌 매절로 번역료가 책정되기도 한다. 매절이란 그 책의 판매 부수와 관계없이 원고지 매당 작업료를 받는 것이다. 200자 원고지 1매당 4000∼7000원이다. 이 매절 번역료의 희비가 엇갈리는 건 번역서가 베스트셀러가 됐을 경우다. 판매 인세로 계약했다면 책이 팔린 만큼 번역료가 지급되니 상당한 금액의 작업료를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원고 매절로 계약했다면 추가 인세가 없으니 일회성 지급으로 끝나는 셈이다.

출판계에서는 묘하게 일본어권 번역료를 유럽 언어권이나 영미권에 비해 낮게 책정해도 된다는 편견이 있었다. 요즘에는 이런 편견이 거의 사라졌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일본어권의 매절 번역료가 다른 언어권에 비해 적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일본어 수순이 한국어와 같기 때문에 번역이 수월할 것이고 일하려는 일본어 번역가도 많으리라는 지레짐작이 앞섰다. 원서의 문화권을 이해하고 문맥에 맞춤한 단어 하나를 선택하는 번역 일 난이도에 높낮이가 어디 있겠는가. 번역가의 창의적이고 지적인 노동 결과에 대해 언어권별 공급 수요라는 경제적 법칙을 감안하는 것도 우스꽝스럽다.

일본의 동시통역가이며 인문교양서를 다수 썼던 요네하라 마리의 언어에 대한 분류가 떠오른다. 고립어, 교착어, 굴절어로 나눈 그의 분석은 흥미로웠다. 고립어는 단어 어형 변화가 거의 없고 조사도 없다. 영어, 중국어, 베트남어 등이 고립어 그룹이다. 가령 ‘the black board’는 ‘칠판’이다. 이때 ‘black’은 형용사다. 이것을 ‘black the board’라고 하면 ‘black’은 동사가 된다. 동사의 명령형이 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똑같은 단어가 위치에 따라 명사가 되기도 하고 형용사가 되기도 한다. 어순에 따라 쓰임이 정해지는 언어, 이것이 고립어다.

교착어는 하나의 단어에 다른 품사가 붙는다. 조사가 어미에 붙는 것으로 문장에서 단어의 역할이 정해진다. 단어 자체는 거의 변화하지 않지만 어떤 품사가 붙어서 뜻이 발생하기 때문에 어순보다는 교착하는 조사로 의미가 정해진다. 한국어, 일본어, 헝가리어, 터키어가 교착어다. ‘나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다’가 됐든 ‘편지를, 나는 어머니에게 썼다’가 됐든 뜻은 통한다는 것이다. 굴절어는 러시아어나 프랑스어처럼 문장에서 단어 역할이 단어의 어미나 어두, 단어의 변화나 굴절에 의해 정해진다. 그래서 어순은 자유로운 편이지만 어미의 변화나 인칭 변화 같은 굴절 법칙을 기억해야 한다.

한국어는 교착어라서 품사에 민감하다. 어떤 언어권 문장을 번역하든 한국어로서 그 의미를 만들어내고 문체를 살리는 일은 까다롭다. 한국어로 글을 쓴다는 점에서 번역가도 국내 저자처럼 한국어 이해도가 높아야 한다. 이러한 번역가의 노고로 독자들은 해외 지식 문화를 자연스럽게 흡수할 수 있다. 인세든 매절이든 번역료에는 지식 노동에 대한 예우가 담겨 있다. 번역서를 읽으며 출판인으로서 새삼 각성하게 된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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