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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기억에 남는 이름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강자의 패배는 늘 뉴스거리다. 지난 26일 프로축구 1부 디펜딩챔피언 전북 현대와 3부인 양주시민축구단의 FA컵 경기가 그랬다. 지난해 같은 대회 우승팀이기도 한 전북은 국가대표 선수들을 출전시키고도 승부차기 끝에 패했다. 다음날, 또 그 다음날도 사람들은 챔피언의 초라한 몰골을 비웃었다. 그들을 잡아낸 양주의 이야기는 이상하리만치 적었다. 다들 약자의 승리보다 강자의 몰락을 더 짜릿하게 여겨서일지 모르겠다.

양주를 보고 기억나는 이름이 있었다. 7년 전 일이다. 선배 지시로 양주고덕운동장에 갔다. 3부 리그에조차 몇 없는 인조잔디구장이다. 서른한 살이던 신민수는 주장이자 플레잉코치였다. 포지션은 포백의 중앙수비수지만 경기장 구석구석 영향력을 미쳤다. 쉼없이 공을 끊고, 어느새 공격에 가담해 슈팅을 날렸다. 함께 지켜보던 사진기자는 “저 선수 하나 때문에 상대 공격이 다 막힌다”고 말했다. 그러나 경기는 0대 1 양주의 패배로 끝났다.

신민수는 양주의 창단 멤버다. 창단 이듬해인 2008년 양주는 리그 우승을 했다. 14년이 지난 지금도 양주의 유일한 우승컵이다. 당시 신민수는 팀에 홀로 남은 우승 경험자였다. 팀에 머무르는 주기가 길어봐야 2~3년인 해당 리그에서는 드문 일이다. “상대팀이 우리 노란 선수복만 보면 무서워서 공 한번 제대로 못 찼다”며 그는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웃었다. 직접 타서 건네준 믹스커피를 홀짝대며, 구장 옆 컨테이너박스 사무실에서 어둑한 밤까지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프로에 갈 기회는 있었다. 대학 졸업반 시절 프로팀 입단 제의를 받았다. 금액이 성에 차지 않았다. 조금만 두면 몸이 달은 구단이 액수를 높여 재차 제안할 거라 믿었다. 실력에 자신 있었기에 하반기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그러나 전반기 뒤 훈련 중 연골이 찢어졌다. 프로 계약은 없던 일이 됐다. 받아주는 실업팀이 있었지만 계약 직후 발목을 다쳤다. 회복을 마치니 시즌이 거의 끝난 상태였다. 1년짜리 계약이 끝나 갈 곳이 없었다. 그때 잡아준 곳이 창단을 준비하던 양주였다.

양주의 전성기는 짧았다. 기업 후원이 끊어지고 시 예산이 줄자 출중한 동료들이 하나씩 팀을 떠났다. 신민수는 동료들이 사라진 양주에 홀로 남았다. 어려울 때 잡아준 곳을 상황이 달라졌다 해서 나갈 수 없었다. 그는 선수 생활을 마칠 때까지 양주에서 뛰었다. 부상으로 은퇴한 뒤 구단 사무국에서 1년 반쯤을 보내고서야 그는 떠났다. 얼마 간 자영업에 손을 대다 최근에야 축구계로 돌아왔지만 양주와는 상관없는 곳이다.

신민수는 잔디에서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한다. 2017년 3월 FA컵 3라운드, 전반 30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양주 진영으로 공이 날아오는 걸 보고 그는 달려가 걷어내려 했다. 몸을 부딪치던 상대가 갑자기 몸을 틀자 한 발로 잔디를 딛고 있던 신민수의 무릎이 꺾였다. 그는 “인터뷰 뒤 4년 동안 십자인대가 4번 끊어졌다. 마지막 부상 땐 의사가 ‘무릎에 더는 구멍 뚫을 곳이 없다’며 그만두라더라”면서 또 사람 좋게 웃었다.

‘결과가 곧 실력’이라고 쉽게들 말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다들 알고 있다. 실력 차가 까마득한 팀 사이 승부에서도 결과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제아무리 재능이 출중해도, 누구보다 성실히 자기관리를 하고 노력을 쏟아붓더라도 선수의 경력이 어떻게 끝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대부분의 경우 우승열패(優勝劣敗)란 승자를 그럴듯하게 칭찬하기 위한 수식일 뿐이다. 양주가 전북을 꺾은 날, 경기를 지켜본 신민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미련이 남아서인가라는 질문에 모르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화면 속 기뻐하는 선수가 자신일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지 않을까, 멋대로 짐작했다. 양주는 승리 사흘 뒤 리그 경기에서 0대 2로 무력하게 패했다. 챔피언의 패배에 들떴던 이들도 더는 그 승부를 이야기하지 않았다.

조효석 문화스포츠레저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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