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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이건희 미술관 건립 3가지 조건은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요즘 미술계 최대 관심사는 ‘이건희 컬렉션’ 기증으로 추진되는 미술관 건립안이다. 기증 문화의 새로운 역사를 쓴 국가적 경사인데도 마냥 환영할 수만은 없는 분위기다. 이건희 컬렉션 유치를 희망한 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균형발전 차원에서 비수도권에 미술관을 세워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면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일각에서는 미술관 건립 위치와 관련해 관객 접근성을 강조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발언을 지방 홀대로 해석하며 문체부를 압박하기도 한다.

수도권 대 비수도권 대결 구도로 치닫는 현 상황에 대해 많은 미술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후보지 선정은 지역 문화 향유 권리 차원에서 접근할 사안이 아니다. 정치인이나 지자체장의 업적을 과시하는 홍보 수단으로 이용돼서도 안 된다. 향후 건립되는 미술관은 기존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새로운 미술관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희 컬렉션은 고미술품과 서양근대미술품이 2만3000여점에 달하는 초특급 컬렉션이다. 개인 소장품이라기에는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한 데다 작품의 질도 우수해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문제는 대한민국 역사상 세기의 컬렉션을 기증 받은 후에 미술관을 건립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다는 데 있다. 이는 미술관 건립부터 성숙한 단계에 도달할 때까지 경험 부족으로 인한 많은 시행착오를 겪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020 전국문화기반시설총람 기준 통계 현황에 따르면 등록 미술관은 총 267개관으로 국립 1개관, 공립 72개관, 사립 179개관, 대학 15개관이다. 이 중 소장품 규모와 가치를 미술관 건립에 반영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컬렉션은 미술관의 특성과 목표, 전략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을 비롯해 지자체가 운영하는 공립미술관들은 영구적 컬렉션이 없는 상태에서 미술관 건물부터 짓고 개관했다. 특히 공립미술관들은 컬렉션 없이 경쟁적으로 건립돼 기획전만으로 운영되다가 매년 소장품을 구입하는 실정이다. 즉 하드웨어만 있고 콘텐츠가 없는 공립미술관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소장품에 대한 예술적 평가, 해석, 학술연구, 체계적 정리 등 그 가치를 재생산하는 역할을 하는 소장품 관리 부서도 없다. 컬렉션 확보가 최우선인 문화선진국에 비교하면 부끄러운 현주소다.

해외 유명 미술관의 컬렉션은 미술관의 정체성, 상징성, 미래 전략을 의미하는 모든 것인 동시에 그 이상의 것이다. 따라서 컬렉션을 가장 먼저 확보하고 설립 주체, 후원자, 위원회 논의를 거쳐 소장품 특성을 반영한 부지 선정, 건축가 섭외 등의 과정을 통해 미술관을 짓는다. 또 학예직은 컬렉션을 새롭게 조명하는 전시와 교육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소장품을 연구한 출판물들을 발간하며 컬렉션의 신화를 만들어낸다. 미술관 건물부터 짓고 소장품을 모으는 한국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다.

자, 이건희 컬렉션 미술관은 어디에 짓고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 게 가장 바람직한가? 이 질문은 간단해 보이지만 대답은 쉽지 않다. 다만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르네상스 회화컬렉션’이라는 찬사를 받는 이탈리아 우피치미술관의 메디치 컬렉션 기증 사례를 참고하면 답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 컬렉션 기증의 선구자인 메디치 가문의 후손인 안나 마리아 루도비카는 1737년 로레나가(家) 왕조와 수집품 양도 협정을 맺으면서 다음 3가지 조건을 걸었다. 첫째, 국가의 영예를 드높이고 둘째, 피렌체 시민의 공익에 보탬이 되며 셋째, 외국인들의 관심을 끌 수 있어야 한다. 대한민국 최초의 고품격 미술관을 건립하는데도 국가 자긍심 고취, 대중에 대한 봉사, 해외 관광객 유치, 이 세 가지 조건이 적용돼야 한다. 한국에도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미술관이 탄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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