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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수노적산

장유승(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수노적산(收孥籍産)은 죄인의 가족을 노비로 삼고 재산을 몰수하는 형벌이다. ‘대명률’에 “반역을 도모한 죄인의 처자는 공신의 노비로 삼고 재산은 관으로 귀속한다”라는 조항이 있다. 범죄수익에 한해 몰수하는 오늘날과 달리 전 재산이 몰수 대상이며, 죄인의 가족까지 처벌하는 연좌제라는 점에서 사형보다 더한 형벌이다.

계유정난, 중종반정, 인조반정처럼 국왕이 바뀌는 정변이 일어나면 으레 대규모 수노적산이 뒤따랐다. 지난 정권의 잔재를 뿌리뽑으려는 의도다. 노비로 삼은 죄인의 처자와 몰수한 재산은 국유화가 원칙이지만 대개는 정권 창출에 기여한 공신에게 분배했다. 당시 실록을 보면 어느 죄인의 아내를 어느 공신의 여종으로 삼았으며, 어느 죄인의 집과 땅을 어느 공신에게 주었는지 자세하게 쓰여 있다. 연좌된 가족 입장에서는 하루아침에 사대부에서 노비로 전락했으니 죽음보다 더한 치욕이다. 이 치욕을 피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람도 드물지 않다.

탐욕 앞에 윤리는 무력했다. 계유정난 이후 세조가 단종비 송씨를 노비로 강등하자 공신 신숙주는 송씨를 자기 노비로 달라고 요구했다. 세조는 차마 그렇게는 할 수 없었는지 거부했다. 한때 왕비로 모시던 사람을 여종으로 삼으려 시도한 신숙주는 두고두고 욕을 먹었다. 중종반정의 주역 박원종은 반정에 성공한 뒤 연산군의 궁녀를 첩으로 삼았다가 지탄을 받았다. 아무리 폭군이라지만 임금의 여인을 차지한다는 것은 당시 도덕관념상 용납할 수 없는 처사였다. 한집안에서 역적과 공신이 동시에 나오는 바람에 역적 조카의 첩을 공신 숙부가 차지하는 패륜도 벌어졌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에게 협력한 수많은 사람이 처형당했다. 가족은 노비로 삼고 재산은 몰수했다. 오랜만의 대규모 수노적산이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반정 공신들은 물론 관청들까지 몰수 재산을 차지하려 아귀다툼을 벌였다. 서로 소유권을 주장하며 다투는 정도는 양반이었다. 처벌이 확정되지 않은 죄인의 재산을 선점하거나 혼란을 틈타 엄연히 주인이 있는 재산을 빼앗았다. 죄인의 재산을 밀고자에게 상으로 주는 제도 탓에 재산을 노리고 멀쩡한 사람을 역모로 무고하는 일도 벌어졌다.

수노적산을 당한 집안은 멸문에 가까운 화를 입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무고가 밝혀지거나 역사적 재평가에 따라 기사회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대왕의 왕자 영풍군은 계유정난에 연루돼 수노적산을 당했다. 300년이 지나 영조조에 복권이 되자 후손들이 몰수당한 재산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다. 당쟁의 격화로 정권이 바뀌는 환국이 잦아지면서 이런 일은 빈번했다. 다산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몰수 재산을 관리하는 관청을 따로 설치하고, 훗날 무죄로 밝혀질 경우를 대비해 몰수 재산 목록을 문서로 보관하자고 제안했다. 몰수 재산을 둘러싼 여러 관청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한편 원상회복에 대비한 조처였다.

‘이건희 컬렉션’을 둘러싼 지방자치단체 간 유치 경쟁이 과열로 치닫고 있다. 컬렉션의 규모와 가치는 백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수준이다. 지자체에서 유치를 바라는 것도 당연하고, 이참에 국립근대미술관을 세우자는 미술계의 주장도 일리가 있다. 그러나 이번 기증이 절호의 기회인 양 각자 유리한 쪽으로 끌고 가려 여론전을 벌이는 모습은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몰수 재산을 차지하려고 아귀다툼을 벌인 과거 공신들의 행태와 다를 것이 없어 보인다. 이건희 전 회장은 죄인이 아니고, 컬렉션 역시 몰수품이 아니라 기증품이다. 고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웠을 유물들이다. 고인과 유족의 숭고한 뜻을 존중하고 합당한 예우를 다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유승(단국대 연구교수·동양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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