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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 플라스틱 격세지감

문수정 산업부 차장


재작년만 해도 세상에 없던 물건이 있다. 엄밀히 말하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과 같은 모습은 아니었다. ‘무라벨’ 생수 이야기다. 아무런 포장 없이 투명한 페트병에 담긴 무라벨 생수는 2019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판매되지 않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더 이상 무라벨 생수는 낯선 제품이 아니고, 음료·생수시장은 무라벨 제품을 늘려가고 있다.

전에 없던 물건인 무라벨 생수가 국내에 처음 등장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롯데칠성음료가 무라벨 생수 ‘아이시스 ECO’를 출시하면서다. 라벨을 완전히 제거한 제품을 판매하는 건 간단치 않은 일이다. 예를 들어 생수 라벨에는 수원지, 제조사, 용량, 영양정보 등의 제품 상세정보가 담겨 있다. 제품을 팔 때는 식품위생법상 이런 정보를 반드시 알려야 한다.

라벨을 없애면 비닐 쓰레기를 줄이게 되지만, 정보 표시가 곤란해진다. 그래서 대부분 무라벨 제품은 묶음 판매로 이뤄지고 있다. 이를테면 생수 20개들이 한 묶음마다 제품 정보 스티커를 하나씩 붙이는 식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정보가 간단해 뚜껑에 표시할 수 있는 생수의 경우, 500㎖짜리 무라벨 제품이 편의점 등에서 낱개로 판매되고 있다.

무라벨 제품이 등장한 것은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그만큼 심각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병규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가 쓴 ‘플라스틱은 어떻게 브랜드의 무기가 되는가’라는 책에 따르면 플라스틱 연간 생산량은 1950년 150만t에서 2019년 3억7000만t으로 250배나 급증했다. 지금껏 생산된 83억t의 플라스틱 가운데 버려지거나 태워 없앤 플라스틱은 63억t에 이른다. 폐기물로 나온 플라스틱의 재활용률은 고작 9%뿐이다. 이런 추세라면 2050년엔 바다에 물고기보다 플라스틱이 더 많을 것이라는 끔찍한 전망도 나온다.

비닐 사용을 줄이고 재활용률을 높이는 것은 생존을 건 절박한 일이 됐다. 정부는 지난해부터 음료 페트병을 재활용하기 좋은 투명 제품으로 바꾸도록 했다. 제도가 바뀌면 기업은 따라야 한다. 소비자들의 친환경 정책 요구도 기업을 움직이고 있다. 세계적으로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이 중요해진 것도 기업의 적극적인 대처를 이끈다.

전방위 압박은 기업이 돈을 쓰게 했다. 무라벨 투명 페트병 제품을 대량 생산하려면 투자가 필요하다. 페트병에 제품명 등을 새기려면 설비를 바꿔야 한다. 새로운 디자인을 적용하려면 일정 기간 공장 가동을 멈춰야 한다. 초기 설비 투자비용과 일정 기간 생산 손실을 감수해야 한다. 이윤을 최우선 가치로 삼는 기업 입장에서 ‘투자할 만’ 했기에 성사된 일이다.

그리하여 색색의 플라스틱으로 제품의 정체성을 표시하던 시대를 지나, 투명함을 강조해 브랜드의 가치를 드러내는 시대가 됐다. ‘플라스틱 격세지감’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다. 정부가 페트병 규제를 앞세운 건 페트(PETE) 소재가 재활용하기에 좋은 플라스틱이기 때문이다. 투명하고 깨끗하게 쓴 페트병은 옷, 생활용품, 카펫 등으로 재활용이 가능하다. 페트병을 잘 만들어 곱게 쓴 뒤 깨끗하게 다시 사용하는 것은 플라스틱 재활용률을 끌어올리는 현실적인 방안이다.

정부의 친환경 규제, 기업의 적극적 투자, 소비자의 열성적 참여가 합을 이루면 자원의 선순환 흐름에 올라탈 수 있게 된다. 물론 재활용만으로 플라스틱 쓰레기를 드라마틱하게 줄이기란 어렵다. 그러나 쓰레기가 쌓이는 속도를 줄여나가는 데 기여할 수는 있다. 정부, 기업, 소비자가 함께 노력한다면 플라스틱 쓰레기 절감이 ‘미션 임파서블’은 아닐 테다.

문수정 산업부 차장 thursda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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