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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샛강에서] 한숨만 남은 명동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며칠 전 지인들과 명동 근처에서 점심을 했다. 마음에 점을 찍듯 가볍게 먹는 점심(點心)인데 과하게 먹은 듯했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명동으로 향했다. 인파가 많은 곳에 굳이 갈 필요가 있냐는 의견도 있었지만 대세는 아니었다. 서울에 살면서 명동에 간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한 3년 전쯤 됐을까. 중국 관광객의 왁자지껄한 말투에다 일본 관광객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넘쳐나는 거리. 걷는다기보다 떠밀려간다고 해야 할 만큼 인파로 가득한 거리.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장 최근의 명동은 그랬다.

명동성당이 보이자 너도나도 대학교 때의 추억에 잠겼다. 1980년대 민주화의 성지에서 맹활약(?)했던 당시의 경험담과 목격담이 이어지면서 명동 메인 거리가 한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을 의심했다. 점심을 마친 인근 회사원들만 눈에 띄었을 뿐 거리는 대체로 한산했다.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너무 의외였다. 시끄러웠던 중국 관광객들의 목소리는 그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었고 매장은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명동 거리 곳곳을 걸어 봤지만 외국 관광객은 온데간데없었다. 중국·일본말로 외국 관광객을 붙잡던 한국의 대표 거리가 맞나 싶었다. 빨간 옷을 입은 관광통역사들의 “관광 안내해 드립니다”라는 목소리가 공허할 따름이었다.

‘폭탄 세일’ ‘중국 여행객 열렬 환영’ 같은 문구는 사라지고 건물 곳곳엔 ‘임대 문의’ ‘사정상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종이만이 나부꼈다. 건물 전(全) 층이 통째로 빈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메인 거리는 그나마 형편이 나았다. 골목으로 들어서면 폐점 상가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곳곳에 보이는 텅 빈 매장들은 스산함마저 자아냈다. 중국인들로 넘쳐나던 ‘욕망의 거리’가 한숨이 넘쳐나는 거리로 전락한 듯했다. 명동(明洞)이 아니라 암동(暗洞)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는 통계로도 나온다. 한국부동산원(옛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명동의 중대형 상가 공실률은 38.4%다. 같은 기간 명동 소규모 상가 공실률도 38.3%로 중대형 상가와 비슷하다. 이는 유흥시설에 대한 집합금지 및 영업정지 등의 영향을 받은 이태원 상권(31.9%), 홍대·합정 상권(22.6%)보다 월등히 높은 수치다. 빈 상가가 많아지면서 임대료도 하락했다. 임대료 변동 추세를 나타내는 중대형 상가 임대가격지수에서 명동의 하락폭은 12.73%로 광화문(3.52%)과 종로(1.28%)보다 훨씬 높았다. 임대료가 낮아졌지만 그렇다고 공실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 대표 상권의 이 같은 추락은 코로나19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이 상인들의 분석이다. 모든 마케팅을 중국인에게만 올인하다보니 화장품, 의류로 상권이 단조로워졌고 내국인의 관심은 점점 멀어졌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로 중국인 발길이 뚝 끊어지면서 직격탄을 맞았다. 내국인이 다시 찾기 위해서는 판매 아이템부터 서비스, 정책까지 중국인 위주에서 벗어나 명동 거리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다. 개성 있는 가게가 많았던 ‘추억의 거리’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1950∼60년대 명동은 문화예술인들로 북적였다. 동방문화회관에는 시인 박인환과 김수영이 들락거렸다. 모나리자 다방에는 백영수 화백이 개인전을 열기도 했고 인근 음악다방 돌체에는 나운영과 김순남 이건우 등이 작곡 활동을 했다. 경상도집이라는 선술집에서 박인환은 시상이 떠올라 시를 짓고, 그것을 듣고 있던 작곡가 이진섭이 곡을 만들었다. 노래는 임만섭이 불렀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명동샹송 ‘세월이 가면’은 이렇게 탄생했다. 이렇듯 역사와 추억이 가득했던 거리, 세월이 가도 잊지 못할 거리. 명동의 본래 모습이다.

김준동 공공정책국장 겸 논설위원 jd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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