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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소프트 인문학 붐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일본 출판사인 이와나미쇼텐의 편집자인 바바 기미히코는 2004년 출간된 ‘출판재고(出版再考)’에서 “포스트모던이 유행하고, 일본이 뉴아카데미즘 유행에 들떠 있던 1980년대 이후 새로운 사상은 생겨나지 않았고 당분간 생겨날 것 같지도 않다. 그 이후 대형 기획 선집도 자취를 감추고 출판 기획 규모 자체가 작아졌다. 편집자가 눈이 확 뜨일 정도의 대사상가나 초일류 학자의 출현을 손꼽아 기다리기만 해서는 길은 열리지 않는다. 시대 흐름을 읽으면서 몇 천 년에 걸쳐 쌓아온 인류의 지적 유산을 새롭게 구성하는 지혜와 조직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내 출판시장에서도 ‘인문주의’는 점차 사라져가고 진리 탐구의 산물인 인문학 서적은 점점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그런데 현실은 오히려 인문학의 붐이 거세게 부는 것처럼 보인다. 경박단소한 내용의 인문서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중에게 쉽고 재미있게 지식을 전해주는 책을 펴낸 인포테이너들이 방송에 진출해 조명을 받고 큰 인기를 얻으면서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이른바 ‘예능인문학’이다.

몇몇 예능인문학자들이 펴낸 책들에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적지 않았다. 그들의 책은 학문적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실용서적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검증되지 않은 지식의 나열과 시대정신과도 거리가 있는 개인의 체험을 간략하게 정리한 인문서들을 놓고 논쟁을 벌일 가치가 있느냐는 다소 원색적인 비판이 등장하기도 했다.

인문학 서적이 강단 엘리트 학자의 전유물인 것은 아니다. 아무도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이 다가오고 있으니 앞서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책을 쓸 수 있다. 아니 써내야 한다. 마침 독자들은 책에서 지식을 갈구하지 않는 세상이 됐다. 대중은 ‘지식 따위는’ 검색을 통해 대강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찾고자 하는 것은 살아낸 이의 지성, 혹은 지혜다. 나름대로 세상을 열심히 살아냈다고 자부한 이들이 펴낸 200쪽 미만의 책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지성을 열심히 찾고 있다.

그 결과 시중엔 ‘소트프 인문학’ 서적들이 범람하고 있다. 간략하게 요약한 실용서에 가까운 책들이 인문서로 포장돼 출판시장을 장악한 듯하다. 인문주의를 고수하던 출판사들마저 이제 가벼운 인문학 시리즈를 앞 다퉈 펴내고 있다. 이런 책들에서 진정한 인문주의 정신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먹힐 리가 없다. 일간신문의 책 담당 기자들이 가슴 뜨거운 책을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인문서 베스트셀러에는 ‘쓸데없는 요설(饒舌)’만 넘친다는 비판 또한 없지 않다.

이런 현실이 이해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출판사들은 진지한 인문학 서적을 펴내서는 편집자의 인건비도 뽑아내기 어렵다. 지식인들도 힘만 들고 명예나 경제적 부라는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일에 뛰어들려 하지 않는다. 물론 신성하거나 이상적인 진리를 추구하는 시대는 아니다. 모두가 당장 써먹기 좋은 효율적인 것만 찾는 세상이다. 15년 전에는 강단 학자들과 인문출판사 대표들이 인문학의 위기 선언을 하면서 국가의 대응을 촉구했었다. 그래서 인문학 저자들을 지원하는 제도는 많이 늘어났다.

역설적이게도 지원이 늘어나면서 인문학의 위기는 더욱 심화됐다. 원래 인문학은 삶의 길을 터놓는 법이다. 폭설이 내려 사람이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길일지라도 누군가 용기를 내어 앞장서 걸어가고 뒤이어 몇 사람이 따라 걸으면서 길을 내놓으면 나중에 터널이 되고 고속도로가 되는 법이다. 그런 용기를 내는 사람은 이제 찾아볼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위기 선언을 주도한 이들이 원한 것은 이런 세상이었던가! 이제는 공개적으로 위기를 선언하는 학자들도 사라지고 없다. 그래서 지금의 소프트 인문학 붐이 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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