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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주 칼럼] ‘국가의 딸’이 세상을 떠났다


강제추행 즉시 신고 했지만
피해자 보호 시스템 작동 않고
조직적 은폐와 묵살 이어져

용기내 성폭력 피해 신고하면
되레 진급과 심사 불이익
집단적 따돌림에 고통받아
군 성범죄 대응책 개선 시급

이 비극은 가해자뿐 아니라
사건 무마·회유하려던 상관
알고도 모르는 척한 모두 책임

딸이 세상을 떠났다. 공군 중사였다. 공군은 어릴 적부터 꿈이었다. ‘국가의 딸’이라며 군인임을 자랑스러워하던 아이였다. 딸은 코로나19로 회식 금지령이 내려졌던 지난 3월 2일 밤 상사의 지시로 회식에 불려나갔다. 돌아오는 차에서 선임 중사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딸은 다음 날 즉시 상관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마땅히 이를 철저히 수사하고, 피해자와 가해자를 즉각 분리해야 할 군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가해자를 구속 수사하기는커녕 딸에게 합의를 종용했다. 가해자의 인생이 불쌍하니 없던 일로 넘어가자는 것이었다. 그렇게 딸의 고통이 계속됐다. 심리적 압박을 견디다 못한 딸은 5월 21일 혼인신고를 한 날 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 모습을 동영상에 담아 가족에게 보내며 억울함을 호소했다.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비로소 국방부 장관이 찾아왔다. 따님의 한을 풀어드리겠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소중한 우리 딸이 이제 세상에 없는데.

남성이 절대 다수인 집단에서 소수자로 고군분투해온 한 여성이 성범죄를 당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곳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피해자는 깊이 좌절했다.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미투’ 운동이 들불처럼 퍼졌던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번 사건은 발생부터 처리 과정 모든 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지 않는 총체적인 문제를 담고 있다. 군대는 사건을 뭉갰다. 사건 당시 피해자의 절규가 담긴 차량 블랙박스 증거가 제출됐는데도 공군은 즉각적인 조사를 하지 않았다. 피해자 보호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았다. 대신 조직적인 은폐와 묵살이 이어졌다. 피해자가 옮겨간 부대에선 문제를 일으킨 군인이라고 수군거렸다. 명백한 2차 가해가 피해자를 견딜 수 없게 했다. 남성 국선 변호인은 선임된 후 단 한차례도 직접 면담을 하지 않았다.

피해자는 정신과 상담을 요청했다. 죽고 싶다는 심경도 밝혔지만 상담 결과 자살 징후는 없음으로 기록됐다. 극단적 선택을 하기 한 달 전, 자해까지 했지만 군 당국은 알고도 방치했다. 심지어 그의 사망은 단순 변사로 보고됐다. 그가 성추행 피해자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는 사실은 윗선까지 보고되지 않았다. 더 충격적인 건 피해자가 이런 일을 당한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근 1년 사이에 적어도 3차례 각각 다른 이로부터 강제추행을 당했다. 피해자가 처음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걸 보고 추행이 반복적으로 이뤄진 것이다. 참담한 현실이다. 그가 감당했을 고통은 감히 상상조차 힘들다.

군대에서는 성폭력 피해를 신고하는 것부터 큰 용기가 필요하다. 성희롱이나 추행을 당해 문제를 제기하면 ‘사회생활 못하는 사람’으로 여겨진다. 내부고발자라는 꼬리표가 따라붙고 부대 내 따돌림의 대상이 된다. 여군은 인원이 적어 금방 특정되고 소문도 급속히 퍼진다. 진급과 장기복무 심사에서 인사 불이익을 받기 일쑤다. 가해자는 가벼운 처벌을 받고 군에 복귀하지만, 용기를 내서 신고한 피해자는 스트레스와 따돌림으로 군을 떠나야 하는 모순이 반복된다. 이런 조직 문화에서 누가 선뜻 신고를 할 수 있을까.

2013년, 2017년에도 비슷한 비극이 있었다.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이번 사건도 죽음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을까. 최근에도 여군 숙소에 무단 침입해 속옷 등을 불법 촬영한 공군 하사가 구속됐다. 피해자는 10명이 넘는다. 여군 비율은 점점 늘고 있는데 군대라는 조직은 이리도 보편적인 성인지 감수성을 따라가지 못한단 말인가. 문재인 대통령은 “억울한 죽음을 낳은 병영 문화 폐습에 매우 송구하다”고 사과했다. 군 성범죄 대응 시스템의 대대적인 개선이 시급하다.

피해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가해자뿐이 아니다. 사건을 무마하고 회유하려고 했던 군 관계자들도 공범이다. 도움을 요청하는 목소리에도 어떠한 실효적 조치를 취하지 않은 방관자들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우리 사회는 국가의 딸임을 자랑스러워하던 한 생명을 잃었다. 이런 일이 벌어질 동안 국가는 과연 무엇을 했는가. 이제라도 국가가 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한을 풀어줘야 할 것이다. 사건을 축소·은폐하려 했던 이들과 피해자 보호에 실패한 지휘관에 대한 엄중한 수사부터 시작해야 한다.

한승주 논설위원 sjha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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