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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의 티 테이블] 피할 수 없는 시간


영국 런던에서 평화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치매 노인 안소니. 그를 찾아오는 건 딸 앤뿐이다. 안소니는 늘 차는 시계를 매번 어디에 뒀는지, 딸이 결혼했는지 이혼을 했는지 종종 잊지만, 누군가의 돌봄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억이 뒤섞여 갈수록 지금의 현실과 사랑하는 딸, 그리고 자신까지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다. 현재 상영 중인 영화 ‘더 파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치매 환자 시선에서 그려진 밀도 높은 심리극이다.

치매의 세계는 현실과 가상의 세계가 구분되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섞이고, 사람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다. 그런 치매 심리의 구조가 영화에 그대로 담겨 있다. 안소니가 요양 병원에서 “내 이파리가 다 떨어진 것 같다”며 흐느끼는 장면은 가슴을 저민다. 이 영화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안소니 홉킨스는 촬영할 때 아버지 생각이 나서 눈물을 그칠 수 없었다고 했다. 감정을 달래기 위해 촬영 후 휴식을 요구했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관람객 대다수가 치매를 앓는 안소니의 모습에서 노부모의 얼굴을 기억했고, 언제 다가올지 모르는 자신의 미래를 그려봤을 것이다.

인생의 모든 계절은 저마다 의미가 있다. 자연이 한 계절에서 다음 계절로 옮겨져 가는 것처럼 인간 역시 끊임없이 변화하며 발전한다. 생애발달주기에 따라 예외 없이 통과의례를 거친다. 권위에 순종하며 학업에 힘쓰는 유년기와 자주적으로 선택하고 행동하는 성인기를 지나, 인생의 참의미를 찾는 노년기에 이른다. 그러나 누구나 처음이기에 미숙하다. 미리 살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든 부모님의 외로움이 어떤 건지 심정을 알기 힘들다.

나이 들어 배우자를 떠나보내고 혼자 돼 본 후에야 “그때 우리 어머니가 혹은 아버지가 이런 심정이셨겠구나. 좀 더 잘해드릴걸”하며 후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부모가 “내가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것 하나 못해주냐”라는 말을 할 때 “또 시작이군”이라며 귀를 닫기보다 “우리를 키우실 때 정말 고생하셨네요”라고 말하는 편이 자신을 위해 더 좋다.

지금 노부모의 심정을 알지 못해도 헤아려 보고 외로움을 달래드리다 보면 내가 그 나이가 됐을 때 그런 외로움을 겪지 않게 된다. 나이든 부모의 모습을 통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녀에게도 덜 의지하게 된다. 만약 지금 부모 봉양에 힘든 시간을 보낸다면 나 자신을 위해, 내 노후를 위해 저축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 보자. 내가 늙어서 겪을 고통을 지금 예방한다는 마음으로 노부모를 대하는 것이다.

한 블로그에서 읽은 내용이다. 80대 치매 노인이 60대 아들에게 “아저씨 저 새 이름이 뭐예요?”라고 물었다. 아들은 “아버지 저 새는 까치예요”라고 친절하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똑같은 질문이 5~6차례 이어지자 화가 난 아들은 “아버지 이제 더 묻지 마세요. 도대체 몇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시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이를 지켜보던 80대 노모가 오래된 일기장 한 권을 아들에게 내밀었다. 펼쳐진 빛바랜 일기장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빠 저 새 이름은 뭐예요?’ ‘아들아 저 새는 까치란다.’ 아들은 오늘 까치란 새에 관해 30번이나 물었다. 30번 다 까치라고 대답해 주었다. 우리 아들은 훌륭한 조류학자가 되려나 보다.”

인생의 시계는 지금 거침없이 앞으로 가고 있다. 다가올 또는 다가온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지 미리 준비해야 한다. 노년기에 중요한 것은 아직 뭔가를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아니다. 현재 내가 어떤 사람인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자신이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두려운 감정이 노인들의 마음을 가장 아프게 한다.

노년기의 과제는 과거를 경멸하지 않고 오히려 과거로부터 교훈을 찾아내는 것이다. 노년기는 인간이 자기 인생을 돌아보면서 ‘인생에서 무엇이 가치 있는가’라는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는 시기이다. 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다. 어린 시절에 하나님을 알게 될 수도 있고, 장년이 돼 왕성히 활동하는 중에 하나님을 알게 되기도 하고, 은퇴한 뒤 노년의 묵상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기도 한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인생의 어느 단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은 인간 존재의 가장 큰 사건이 된다. 우리 앞에 놓인 인생의 선물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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