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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그림을 빌려주는 도서관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얼마 전 집 근처 도서관 회원이 됐다. 책을 읽는 것보다 사는 데 열심인 사람답게, 마지막으로 도서관을 이용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넘치는 옷장을 바라보다 당근마켓을 시작했을 때의 마음으로, 넘치는 책장을 보다 못해 비장한 결심으로 도서관을 찾은 것이다. 몇 분 만에 회원 가입을 하고, 10권의 책을 한 달 동안 빌릴 수 있게 됐다. 검색과 대출, 반납까지 비대면 이용이 가능했다. 집에서 도보로 10분이면 도착하는 도서관에 왜 이제야 왔을까.

책을 빌리는 일은 책을 사는 일만큼이나 재미있다. 도서관에서는 서점에서와는 다른 관점으로 책을 선택하게 된다. 표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서리가 구겨지진 않았는지, 책의 크기나 가격이 어떠한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소장할 책이 아니라서 알고 싶은 분야의 책들과 읽어보고 싶은 책들을 마음껏 고른다. 원래 찾으려던 책 주변의 책들까지 살펴보고 관대한 선택을 할 수 있다.

소설 코너에서 정세랑 작가의 작품을 찾다가 정영수, 장강명 작가의 책도 펼쳐보고 빌려오는 식이다. 그렇게 조우하는 책들을 통해 나의 독서는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물론 책을 빌릴 수 있다고 사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도서관을 이용하며 오히려 사고 싶은 책의 리스트는 계속 추가되고 있다. 2020년 한국저작권위원회에 따르면 조사 대상인 전국 도서관 이용자 3878명 전체 도서 대출은 연간 평균 59.5권, 도서 구매는 19.9권이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대출한 것과 같은 도서 구매는 9.9권, 동일 작가 도서 구매는 5.6권으로 도서관에서 대출한 책이나 그 책의 작가가 쓴 다른 책을 사는 경우도 많았다.

미술 작가들의 작업 활동과 그림 판매에 관심이 많은 나는 도서관에서 그림도 빌려주면 어떨까 종종 생각해 본다. 책처럼 간단히 빌릴 수 있다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지 않을까. 나의 공간, 우리 집에 놓을 그림을 고르는 경험을 통해 나와 가족의 취향을 알아가고 공간의 분위기도 바꾸어 볼 수 있다. 마음에 드는 작가가 있으면 그 작가의 전시회를 찾아 구경도 가보고, 언젠가 작품 한 점 구입할 계획을 세워 볼지도 모른다.

숫자도 적고 문턱이 높은 미술관보다 빌려주는 시스템이 자연스러운 도서관에서 그림을 빌려주는 것이 더 현실적이고 효과적일 것 같다. 동네 도서관에는 편한 옷을 입고 책을 담아갈 넉넉한 가방을 가져오는 사람들이 많다. 미술 작품도 도서관에 있으면 책처럼 익숙해지고 만만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지역 도서관에서 매년 지역 신진 예술가의 작품을 꾸준히 구매하고 주민들에게 빌려준다면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아직 연간 5000억원을 넘지 못하는 국내 미술 시장 규모가 커지고, 예술가가 성장하는 데 좋은 거름이 될 것이 분명하다.

2018년 나는 서울시 리빙랩 프로젝트에 아이디어를 제출하고 선정이 돼 실제로 ‘그림을 빌려드립니다’라는 실험을 진행했다. 미리 예약을 하고 방문하도록 했음에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그림을 고르러 오신 분도 있었고, 작가와의 만남에 참여하고 실제로 작품을 구입한 사례도 있었다. 시스템 없이 불편한 방식으로 몇 개월 동안 진행한 실험을 통해 그림을 빌려주는 도서관에 대한 청사진은 더욱 명확해졌다.

이미 도서관은 책이나 자료를 빌려주는 역할을 넘어서서 다양한 연령층이 여가를 보내고 자기계발을 할 수 있는 콘텐츠들을 선보이고 있다. 글쓰기를 비롯한 교양강좌가 열리고, 낭독회나 작가와의 만남이 열리기도 한다. 2019년에는 전남 순천의 도서관에서 작품 대여를 시작한다는 기사가 있었고, 의정부미술도서관 건립 소식도 있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얼굴을 보고 싶다면 거울을 보고, 자신의 영혼을 보고 싶다면 예술 작품을 보라”고 했다. 또한 예술적 경험은 지식을 넘어 감정을 통해 사람들을 연결한다. 도서관이 우리에게 그런 곳이 돼주면 좋겠다.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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