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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아낌없이 베푸는 나무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에서는,/ 더러 나줏손에 살랑살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보며, 어느 먼 산 뒷옆에 바우 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부분)

백석이 1940년부터 광복이 될 때까지 창춘과 만주 지역을 전전할 때 곤궁한 생활 속에서 ‘갈매나무’를 의지의 표상으로 떠올렸듯 내게도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칠 때마다 떠올려 힘을 얻는 나무가 있다. 마을의 가장 오래된 터줏대감으로 자리했던 ‘팽나무’는 오래전 숨을 다해 이제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됐지만 망각을 재촉하는 잔혹한 시간의 홍수에도 휩쓸려 떠내려가지 않고 마음의 터에 굳건히 뿌리 내린 채 여전히 우람한 풍채로 살아가고 있다.

수령을 알 수 없었던 그 나무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동네 우물곁에 거처를 마련해 놓고 해마다 10여평의 그늘 농사를 지었다. 여름날 초저녁 나무 아래 놓인 평상은 엄니와 할머니들 차지였다. 저녁밥 달게 드신 그네들은 화수분처럼 무궁무진하게 이야기꽃을 피워댔는데 슬하에 누워 듣는 맛이 제법 달콤하고, 쓸쓸하고, 쾌활하고, 슬펐다.

좀 더 자라서는 하오의 그늘 안에서 하모니카를 불었고, 생애 최초로 가슴에 두근두근, 까닭 모를 감정을 심어줬던 이웃 마을 숙이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일렁이는 그늘 속으로 여름날의 아이스께끼 장수가 다녀갔고, 달포에 한 번쯤 들리는 방물장수가 다녀갔고, 농사일에 지쳐 부어오른 두꺼운 발등들이 다녀갔다. 뿐인가, 나무의 그늘은 더러 사랑방이 돼주기도 했는데, 마을에 큰일이 생기면 심각한 표정들은 품 안으로 모여들어 주름으로 골짜기 파인 이마들을 맞대고 의논을 하기도 했다.

나무는 봄이면 새 가지에 피운 잎과 꽃으로 오가는 이들의 눈을 맑게 씻어줬고 가을에는 단것에 주린 아이들에게 주전부리로 달콤한 맛을 품은 등황색의 열매를 베풀었다. 나무가 베푼 것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그곳은 악동들 성교육 현장이기도 했는데, 한여름 밤 과년한 마을 처녀들이 환한 달빛 조명 아래 우물에서 등목하는 것을, 나무 뒤에 숨어, 사정없이 물어뜯는 각다귀들과 싸우며 몰래 훔쳐보면서 성에 눈을 떠가기도 했다.

그렇게 피붙이처럼 한시도 떨어질 새 없이 끼고 살았던 나무가 내 기억으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지게 된 것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대처로 유학을 떠나고 나서부터였다. 상경파로 서울에서의 새로운 풍속을 익히고 따르느라 나무를 그리워할 새가 없었던 것이다. 집안에 대소사가 있거나 명절을 맞아 내려갈 때는 나무를 만나는 생활이 지속됐다. 나무는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대했다. 생활에 지쳐 한쪽으로 기운 등과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 아직은 괜찮다,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해 갑자기 찾아든 병고를 이기지 못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연이어 동생이 교통사고로 죽고, 상심한 아버지가 때 이르게 생을 마감한 뒤로는 의무로나 챙기던 고향도 더는 찾지 않게 됐다.

스무 해 만에 친척 문상을 갔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아름드리나무가 볼품없이 삐쩍 말라 몸피가 형편없이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누가 뭉텅 파내간 것처럼 줄기 한가운데를 텅 비워버린 탓이었다. 오랫동안 몹시 심하게 앓았던 모양이었다. 피골상접한 나무를 보자니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수년을 더 버티다가 나무는 화(火) 수(水) 지(地) 풍(風)으로 돌아갔다. 나는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나무가 죽자 우물도 생기를 잃더니 바닥을 드러내고 말았다. 그날 이후 나무는 거주를 내 마음으로 이전해 살게 됐다.

이재무 시인·서울디지털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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