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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현주의 밥상+머리] ‘가정적인’이란 남성형 관형사와 요리

카피라이터·사진작가


우리나라에 즉석밥이 처음 출시된 건 1996년이다. 매년 기록을 경신하며 팔렸다. 다만 한 가지 방해 요소가 있었는데, 즉석밥이 곧 인스턴트라는 인식 때문에 주부들이 구매하면서도 일종의 죄책감을 갖는다는 것이었다. 그 죄책감을 달래고 어르기 위해 ‘어머니가 해주신 밥’이라는 슬로건이 나왔다. 어머니라는 존재가 금방 한 밥 한 공기의 이미지로 유통되는 우리 사회에서 금방 한 밥 같은 즉석밥 광고에 어머니를 소환하는 건 너무나 당연했다. 2005년 무렵 신세대 부부가 광고에 등장했다. 내용은 이랬다.

마트에서 함께 장을 보는 젊은 부부. 남편이 먼저 즉석밥을 집어 든다. 아내가 아니라! “자기야, 이거(제품명을 대며) 안 사?” 남편이 묻고 아내는 못 이기는 척 대답한다(애교 가득한 얼굴로). “그럴까.” 식탁에서 아내가 말한다(미안한 기색으로). “저녁 늦었지? 반찬도 없는데.” 남편, 자상하게 웃으며 답한다. “밥이 맛있잖아.” 감성적 톤으로 접근했지만 이 카피들은 얼마나 전략적이고 치밀한가. 이 광고는 소비자들에게 밀레니엄 시대 신세대 부부는 이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가정적’인 이미지를 가진 남자가 먼저 제품을 선택하게 함으로써 맞벌이를 하는 아내들마저 가지고 있을 일말의 죄책감을 말끔히 사하여 준 광고. 아내가 먼저 즉석밥을 집어 드는 오류를 범하지 않았으므로 즉석밥은 우리 가정에 성공적으로 안착했다.

‘가정적’이라는 말이 유독 남성형인 것은 가정생활에 충실한 남자는 있어도 가정생활에 충실한 여자는 거의 없기 때문인가? 안타깝게도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결혼한 이들이 가정에 충실한 것은 당연한데도 가정적이라는 이유로 남자는 칭찬을 받고, 여자는 너무나 당연해 굳이 말해지지도 않는다. 90년대에 가정적인 남자들은 일요일에 3분 카레를 요리하고, 2000년대 초반에는 즉석밥을 집어 들었으며, 이후에는 파스타를 만들고, 지금은 가족과 둘러앉아 간편식을 먹거나 배달음식을 시킨다.

나도 간혹 즉석밥을 먹는다. 즉석밥을 데우며 나물을 다듬는다. 봄에 다듬어 냉동해둔 봄나물이나 새로 산 취나물, 비름나물이어도 좋다. 나물은 참기름과 소금, 간장 혹은 고추장을 살짝 넣어 무친 후 잘게 송송 썬다. 데운 즉석밥에 썰어 놓은 나물을 넣고, 참기름, 김가루, 통깨를 더해 골고루 섞은 다음 한 숟가락씩 떠서 손으로 동그랗게 빚는다. 나물주먹밥이다. 이것을 시판 유부 주머니에 넣거나 계란을 삶아 노른자를 분리해 주먹밥 위에 뿌려주면 금상첨화다.

남자들에게 ‘가정적’이라는 말이 칭찬으로 쓰인다면 가정적인 여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가정적인 싱글이라는 말은 좀 아이러니하지만, 혼자 사는 사람들은 늘 대충 먹고 살 것 같다는 이상한 고정관념을 없애는 데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다. 미디어에서 요리는 종종 이미지를 위해 쓰인다. 현실에서도 남자들이 어쩌다 한 번 하는 요리가 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주겠지만, 요리는 이미지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온전히 즐기기 위해 필요하다. 여자든 남자든.

카피라이터·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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