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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경의 에듀 서치] 수능 힘싣더니 ‘이준석표 능력주의’ 뭇매… 착각에 빠진 여권


요즘 여권 인사들이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깎아 내리려고 띄우는 책이 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 마이클 샌델 교수의 최근 저서 ‘공정하다는 착각’입니다. 원제 ‘능력주의의 폭정’에서 짐작할 수 있듯 책은 시종일관 신랄하게 능력주의를 비판합니다. 여권 인사들은 책을 인용하기도 하고 논리를 빌려와 한마디씩 거듭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능력주의의 대척점에 있었다는 듯 굴고 있습니다.

책은 미국의 학벌과 대입 제도를 중심으로 미국 사회 전반에 뿌리내린 능력주의를 해부합니다. 미국판 수능인 SAT를 언급한 부분에선 대충 책장을 넘기기 어려웠습니다. “SAT처럼 표준화된 시험은 그 자체로 능력주의를 의미한다”라거나 “연소득 20만 달러 이상인 부잣집 자녀가 1600점 만점에 1400점 이상 기록할 가능성이 다섯에 하나, 연소득 2만 달러 이하에선 오십에 하나”라는 대목에서 특히 그랬습니다. SAT 점수와 고교 내신을 비교하는 부분에선 “SAT 점수를 중시하면 특권층에 유리하다. 고교 내신도 집안 소득 수준과 연관돼 있으나 SAT 점수가 연관성이 더 크다”고 단정적으로 말합니다.

책은 사회·경제적 배경이 다른, 즉 출발선도 다르고 타고 가는 것도 다른 레이스에서 결승선에 먼저 도달하고는 “능력이 입증됐다”며 뻐기지 말라고 일갈합니다. 이런 불공정 레이스에서 승리한 거만한 소수가 다수에게 열패감을 줬고, 그 결과로 트럼피즘(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주장에 대중이 열광하는 현상) 같은 포퓰리즘이 등장했다는 게 샌델 교수의 진단입니다.

한국은 어떨까요.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든 학생부교과전형이든 수능이든 모든 대입 전형에서 부유층 자녀가 유리합니다. 사회·경제적 격차는 현실입니다. 핵심은 정도의 차이. 수능이 부유층에 가장 유리하다는 점은 여러 경로로 확인됩니다. 교육부가 2019년 말 내놓은 ‘학생부종합전형(학종) 실태조사’ 결과도 그 중 하나죠. 서울대 등 주요 13개 대학 신입생 중 수능으로 뽑힌 인원 중 75%는 소득 상위 20% 계층이었습니다. 수능 점수로 줄 세우니 100명 중 75등까지가 먹고 살만한 계층이었단 말입니다. 고교 내신 위주 전형으로 입학한 인원은 57.7%, 학종은 수능 전형과 학생부교과의 중간쯤입니다.

수능은 다른 전형보다 사교육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상위권 변별력 장치인 이른바 ‘킬러 문항’이 사교육 받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를 가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장 유명한 킬러 문항은 2018년 수능의 ‘국어 31번’입니다. 교사들도 못 풀 문제에 대해 “공교육에만 충실해도 푼다”고 기만했다가 당시 출제 책임자가 공개 사과했죠.

교육부는 이후 극강 난도 문항 한두 개를 내던 것에서 ‘준킬러 문항’을 여럿 배치하는 방식으로 논란을 피해갑니다. 그래도 불공정은 진행형이죠. 서울 강남 등 사교육 특구에선 이런 류의 문항을 전문적으로 훈련시켜주는 코스가 존재합니다. 비수도권 고교들을 방문할 때마다 교사들로부터 “사교육특구 아이들과 수능에선 경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 학종이나 학생부교과에 집중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수능 전 영역을 절대평가로 전환하기로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집권 뒤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수능 힘 빼기가 인기를 끌지 못하자 돌변하죠. 공론화라는 ‘알리바이’를 만들더니 정시 비중을 30% 이상으로 의무화하고 ‘불수능’ 기조를 강화합니다. 교육에 대한 철학이나 비전도 없이, 다른 교육정책들에 미칠 여파(예를 들어 고교학점제 도입) 역시 고려하지 않은 채 여론조사로 국가 인재선발 방식을 결정한 포퓰리즘적 행태란 비판이 과해 보이지 않습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 입시 특혜 의혹이 터지자 문 대통령이 직접 팔을 걷어붙입니다. 서울의 주요 대학들의 실질 정시 비중을 45% 수준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당시 교육부는 ‘대입제도 공정성 강화방안’이란 이름으로 문 대통령의 명을 받들었는데, 여기서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자들의 공정을 그대로 수용한 걸로 봐야 자연스럽습니다.

“이준석 대표가 능력주의 신봉자여서 상당히 논쟁적 상황이 벌어질 것.”(이낙연 전 민주당 대표) “사회적 약자에겐 어떻게 공정을 보장할지 보여 달라.”(김부겸 국무총리) “능력주의는 공정을 가장한 부정의.”(김두관 민주당 의원) “능력주의 윤리는 승자의 오만으로, 패자들을 굴욕과 분노로 몰아갔다.”(고민정 민주당 의원)

수능을 대폭 강화해놓은 쪽의 인사들이 수능을 능력주의 그 자체로 규정한 책을 끌어와서는 능력주의 비판에 핏대를 세우는 모습입니다. 능력주의도 ‘내로남불’인가요. 이낙연 전 대표의 경우 수능이 강화될 당시 국무총리였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백미는 조 전 장관의 그 유명한 ‘가재 붕어 개구리론’(가붕개론)을 대안으로 제시한 대목이라고 생각합니다. 샌델 교수가 쓴 본문 말고 역자 후기에 나오죠. 역자는 미국 못지않은 한국의 능력주의를 개탄하며 “누군가의 말처럼 ‘모두가 개천에서 난 용이 되려 하지 않아도 되는, 가재 붕어 개구리도 만족하며 살 수 있는’ 사회제도·문화를 만드는 게 정답”이라며 조 전 장관을 소환합니다.

그러나 가붕개론은 사회지도층의 위선과 내로남불, 어긋난 자식 사랑을 상징하는 말로 각인됐습니다. 조 전 장관 스스로 초래했죠. 비슷한 주장도 앞으로 가붕개론의 아류로 조롱받을 운명으로 보입니다. ‘능력주의의 폭정’에 대항할 싹마저 도려낸 것, ‘조국 사태’가 한국 사회에 끼친 해악 중 으뜸 아닐까요.


이도경 교육전문기자 yid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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