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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섬情談] 좋은 길은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길은 5억6500만년 전에 처음 나타났다. 캐나다 뉴펀들랜드 미스테이큰 포인트의 물가 회색 바위에 한 생명체가 발자국 궤적을 남겼다. 노르웨이 작가 토르비에른 에켈룬의 ‘두 발의 고독’에 따르면 이 화석은 자발적 이동, 즉 생명체가 자기 의지로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움직이는 행위의 탄생을 보여 주는 증거다. 달팽이가 진흙 위를 기어간 듯한 이 흔적으로부터 모든 길이 생겨났다.

대학 시절 학교 곳곳에 풀밭이 있었다. 건물을 잇는 큰길을 콘크리트로 포장한 후 길 사이 빈터와 언덕 등에는 풀을 깔아 조경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정해진 길로만 다니지 않았다. 수업 시간에 맞추려고, 숲의 정취를 즐기려고, 도로의 억압을 이겨내고 발길을 해방해 길들을 만들어냈다. 모든 길은 자유의 실현이다. 샛길은 규범을 어기고 누군가 첫발을 내딛고, 다른 이들이 함께 걸어 생긴, 자유의 흔적이다. 에켈룬은 말한다. “걷는 것은 스스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나는 샛길 산책을 좋아했다. 틈만 나면 학교 곳곳 길들을 탐험하곤 했다. 큰길이 판화로 찍은 듯한 것과 다르게 샛길은 주변과 자연스레 어울리는 개성이 있다. 이 길에선 속삭이는 연인의 환영을 보고, 저 길에선 작은 꽃 앞에서 몽상하는 시인의 그림자를 보고, 또 다른 저 길에선 나무 사이 빈터에 둘러앉은 열혈의 환각도 마주쳤다. 신기하게도 똑바로 난 길은 전혀 없었다.

학교 뒤쪽에 너른 들이 있었다. 봄가을로 바람이 온화하고 햇빛이 잔잔할 때 아무 곳이나 자리 잡고 책을 읽다가 누워서 한잠 자기 좋은 곳이었다. 들에서 사람들은 제멋대로 걸을 수 있다. 본디 나 있는 길은 하나도 없으므로, 어디로든 자유롭게 발을 옮길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직선으로 다니지도, 아무 길로나 다니지도 않았다. 자기 몸에 길을 맞추려는 듯 모양은 다소 흐트러졌으나 몇 갈래 길이 선명했는데, 길은 모두 달팽이 닮은 생명체가 냈던 첫 번째 길처럼 모두 완만한 곡선들이었다. 자유는 직선을 싫어했다.

때때로 언덕에 앉아 너른 들을 내려다보곤 했다. 푸르게 펼쳐진 풀밭에 하얗게 빛나는 길들, 곳곳에 피어난 갖가지 들꽃들과 우아하게 춤추는 나비들이 한없이 눈을 끌었다. 들을 볼 때 일어서는 마음이 야망(野望)이다. 당나라 때 시인 왕유는 ‘갓 갠 들판 바라보며(新晴野望)’에서 노래한 바 있다. “갓 갠 들판은 광활하여/ 끝까지 눈을 돌려도 티끌 하나 없네(新晴原野曠, 極目無 垢).” 분구( 垢)는 먼지라는 뜻이다. 이는 이해에 얽매인 자잘한 마음이고, 생활이 가져온 타락의 흔적이다. 청명한 들을 바라보면서 시인은 울화가 잦아들고 마음이 탁 트이며 상상이 분출하는 걸 느낀다. 이 기분을 존중해 꿈꾸는 마음이 바로 야망이다. 자연을 닮고자 할 때만 인간은 크게 생각할 수 있다. 멀리 내다보는 눈이 큰마음을 만든다. ‘사기’에서 사마천이 “높이 올라서 멀리 보면 온 세상이 눈에 들어오네”라고 한 이유다.

어느 날 지리학을 전공하는 친구와 함께 야망을 하던 중에, 문득 들길과 샛길이 구불구불한 이유를 물었다. 자연 상태에선 똑바로 난 길이 반드시 좋은 길이 아니라고 친구는 말했다. 길은 속도만 좇아서 생겨나지 않는다. 너무 가파르면 휘어지고, 너무 몸이 노출되면 피하고, 너무 뜨거우면 그늘을 따른다. 자유롭게 놓아두면 인간은 아무도 직선으로 걷지 않는다. 아니, 직선으로 걸을 수 없다. 환경과 조화를 이뤄 위험을 피하려면 느릿느릿, 사방을 살피면서, 지그재그로 걸을 수밖에 없다.

야망이란 들처럼 큰마음을 기르는 일이면서 들길의 모양을 살피는 일이기도 하다. 어떠한 큰 뜻도 직선으로 달려서는 이룰 수 없다. 평생 도전과 실패가 수없이 겹쳐진 후에야 간신히 모습을 드러낸다. 임무는 무겁고 길은 항상 멀다. 그러나 좋은 길은 곡선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를 알지 못하면, 아무리 큰마음도 먼 길을 갈 수 없다.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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