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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의 문화스케치] ‘나무’라는 자세


얼마 전 숲 해설가 선생님과 함께 동네에 있는 숲을 걸을 기회가 있었다. ‘산책하는 시’라는 이름의 행사였다. 숲을 걷고 생태를 학습하는 것이 주목적이었지만 녹음(綠陰)을 온몸으로 흡수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종종 산책하던 곳이었지만 “좋다”나 “역시 사람은 초록이 있는 곳에 살아야 해” 정도의 말만 하던 나였다. 소낙비가 쏟아졌다가 행사가 시작되기 전에 그쳤다. 너무 덥지 않게 해주려는 하늘의 배려 덕분이었을까, 혼자가 아닌 함께 걷는 산책길은 걸음걸음 풍요로웠다.

숲 해설가 선생님 덕분에 그전까지는 그저 ‘나무’였던 것의 이름을 알게 된 시간이기도 했다. 스트로브잣나무, 산수유나무, 동백나무, 이팝나무, 버짐나무, 회화나무 등 다양한 나무가 숲에 있었다. “소나무가 무성하면 잣나무도 기뻐한다”라는 속담은 알고 있었으나 정작 소나무와 잣나무를 구분하지 못했던 나였다. 이팝나무의 ‘이팝’이 꽃송이가 쌀밥 같다는 이유로 ‘이밥’이란 말에서 비롯됐다는 것, 덕분에 조상들은 이팝나무의 꽃이 무성하면 그해에 풍년이 든다고 믿었다는 것도 알았다.

숲속에 있는데 문득 ‘숲’이라는 단어가 달리 보였다. 생김새부터 어찌나 안정적인지 숲은 어떤 상황에서도 굳건할 것 같았다. 인간의 이기심만 아니면 욕망을 앞세운 무분별한 개발만 아니면. 자연(自然)은 말 그대로 사람의 힘이 더해지지 아니한 상태로 존재해야 한다. 사위가 어두워질 무렵 숲 해설가 선생님께서 우리를 나무 한 그루로 이끌었다. 숲에 딱 한 그루만 심겨 있는 나무였다. “이 나무 보여요? 얼핏 봐도 아파 보이죠? 왜 그럴까요?” 우리의 눈이 한데 모였다.

군데군데 파이거나 벌어진 그 나무는 바로 자작나무였다. 강원도 이상의 추운 지방에서 자라야 하는데 잘못 심긴 것이다. 화촉을 밝힐 때 쓰였다는 나무, 줄기의 껍질로 명함을 만들기도 한다는 나무, 단단하고 치밀해서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 사용됐다는 나무, 그 나무가 여기서 아파하는 줄 모르고 있었다. 옆에 심긴 다른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주변의 나무들은 자작나무가 아파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햇볕을 덜 받게 하거나 더 받게 할 수는 있어도 기온만큼은 어찌하진 못했을 것이다.

숲의 풍부한 식생도 중요할 테지만, 뭐든 있을 곳에 있어야 진가를 발휘할 수 있다. 숲 해설가 선생님의 말씀은 내게 ‘자리’에 대해 떠올리게 했다. 낯선 곳인데도 편안해지는 자리가 있는 반면 오랫동안 있었는데도 영 불편한 자리도 있다. 자작나무를 등지는 우리의 마음은 무거웠다. ‘나무’라는 자세가 스스로를 나무라는 태도가 돼 있었다. 무지는 편견을 만들고 그렇게 만들어진 편견은 어떤 존재를 병들게 한다. 숲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나무의 일’(시집 ‘왼손은 마음이 아파’ 중에서, 현대문학, 2018)이라는 시의 마지막 연에 나는 “나무가 우산이 되는 일/ 펼 때부터 접힐 때까지/ 흔들리는 일”이라고 썼다. 비단 나무만 흔들릴까. 사람도 매 순간 흔들린다. 작은 고민과 큰 결정 앞에서 오락가락하고 갈팡질팡하는 게 우리다. 그러나 나무는 자신의 자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숲을 나서는 그 순간까지 나무는 거기에 그대로 있어 주었다. 미쁨이 믿음직함이 되는 순간이었다.

집에 와서 뭔가에 홀린 듯 황현산 선생님의 ‘내가 모르는 것이 참 많다’(난다, 2019)를 펼쳤다. 생전에 선생님께서는 많이 아시고 난 뒤에도 모르는 것이 참 많다고 말씀하셨다. 숲을 걷는 것과 숲을 아는 것은 다르다. 알고 나서 걷는 것은 또 다를 것이다. 숲은 계속 자라고 변하기에 모르는 것은 언제고 생겨날 것이다. “겸손은 혼자의 힘으로 못할 일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라는 책 속 문장처럼 우리는 늘 배움 앞에서, 삶 앞에서 겸손해야 할 것이다.

모르는 것이 참 많을 때, 사는 것은 힘들어진다. 모르는 것이 많다는 건 처음의 순간이 많다는 것이기도 하다. 때때로 서툰 마음과 잘하고자 하는 열망이 부딪혀 일을 그르치기도 한다. 동시에 모르는 것이 참 많을 때, 삶은 흥미진진해진다. 아이들이 어딜 가나 콧노래를 부르는 것도 그들에게는 그곳이 미지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자연스러움은 자라면서 흔들리는 나무를 닮았다.

스스로를 나무라는 데 많은 노력을 들였던 나는 이제 ‘나무’라는 자세를 생각한다. 기꺼이 흔들리되 중심만은 잃지 않고 싶다.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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