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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 정책이 아니라 정치가 문제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5년의 새 정책주기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차기 정부 5년을 위한 정책 제안서들이 서점에 깔리고 학회와 연구소에서는 문재인정부 평가와 향후 과제에 대한 토론이 한창이다. 세간의 관심도 정부 동향보다 속속 무대에 오르는 대선 후보들의 정책 메뉴에 쏠리고 있다. 이제 탈원전이나 소득주도성장과 같은 이 정부의 간판 정책들은 반면교사의 재료로나 쓰일 뿐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타임지 표지 인물로 등장해 정책 주도권을 쥐고 ‘마지막 제안(final offer)’을 운위할 수 있는 이슈는 아마 북핵 문제가 유일할 것이다.

지난 4년을 돌아보면 또 다른 5년을 새로 시작할 시간이 왔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되지만 동시에 다음 정권인들 다를까 하는 불길한 예감을 떨칠 수 없다. 모든 정권이 출범할 때 하늘을 찌르는 기세로 앞선 정부의 정책을 뒤엎고 새 세상을 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예외 없이 후임 정부에 의해 똑같이 부정당하고 잊혀왔기 때문이다. 탄핵과 적폐청산으로 어마어마한 유산을 물려받고 출범한 문재인정부는 다른 길을 갈 수도 있었으나 자산을 빠르게 탕진하며 진영 정치의 늪에 빠져들었다. 야당은 대선 승리의 열망을 불태우며 30대 청년을 당대표로 밀어 올렸고 여당이 자랑하던 감사원장과 검찰총장까지 자신들의 대선 후보로 불러냈다. 20년 진보 집권을 호언하던 여당은 정권교체 위기에 몰렸다.

대부분 문재인정부 실패 원인을 정책 선택의 잘못에서 찾지만 이는 절반의 진실일 뿐이다. 정책 성패를 좌우하는 더 중요한 변수는 정책을 끌고 가는 대통령의 정치적 유능함이고 이는 결국 정책을 선별하고 실행하는 국가 시스템 능력에 의해 결정된다. 한 나라가 좋은 정책을 개발하고 국정 과제로 채택해 개혁 과정에서 야기되는 이해 갈등을 조정하고 타협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그 나라의 정치적 합의 능력에 달려 있다.

정치 지도자들이 부러워하는 네덜란드나 독일의 사회적 대타협도 모두 여야가 합작해 만들어낸 합의 정치의 소산이다. 문 대통령은 4년 내내 노사에만 대타협을 호소했을 뿐 자신이 먼저 권력을 나누며 정치적 연합이나 타협을 시도해본 적이 없다. 정권 출범 초기 탄핵에 참여했던 야당과의 연정은 아니더라도 느슨한 정책 연대 또는 협치를 통해 폭 넓은 개혁연합을 구성하지 못한 것은 문 대통령의 정치적 미숙함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판결도 나쁜 합의보다 못하다는 법조계 경구를 되새겼어야 한다.

역대 정부가 모두 실패로 끝나는 이유는 정책의 잘못보다 정치의 실패일 가능성이 높다. 설사 정책이 좀 잘못됐더라도 비판을 경청하고 실행 과정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을 살펴가며 유연하게 보완해 간다면 치명적 실패로 끝나지는 않는다. 탈원전이나 3년 내 최저임금 1만원처럼 캠페인용 슬로건을 최우선 국정 과제로 삼았던 것도 문제지만 더 큰 실책은 이를 비판하는 반대파와 협의하고 조정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최저임금의 경우 2018년 급격한 인상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고 고용 충격이 눈에 보이는데도 정부는 어떻게든 반대파 공세를 따돌리고 인상률을 끌어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사회적 분열과 갈등은 깊어졌고 야당은 비타협과 비협조의 명분을 축적해 갔다. 최근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처는 달랐다. 15달러 최저임금을 공약했지만 공화당 반대에 부딪히자 끝까지 밀어붙이지 않고 민간은 포기하고 정부 부문만 인상했다. 그리고 일자리계획을 비롯한 더 큰 이슈로 옮겨가는 민첩함과 유연성을 보였다.

서점에 깔리는 정책 제안서들은 정권만 바뀌면 세상이 금방 달라질 것처럼 말하지만 이 또한 5년마다 반복되던 레퍼토리로 그칠 수 있다. 정책을 아무리 바꾼다 해도 국가의 정책 능력 또는 정치적 합의 능력을 키우지 않고는 실패가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특이하게도 엘리트 경제 관료 출신 5명이 합작한 ‘경제정책 어젠다 2022’의 마지막 장은 사회적 대타협으로 혁신의 돌파구를 열자는 제안으로 끝을 맺는다. 그러나 다음 정부가 감당해야 할 국가적 과제나 그들이 제안한 정책조차 노사를 비롯한 이해집단의 타협으로 돌파구를 열만한 수준이 아니다. 정치가 먼저 솔선수범해야 하고 집권당이 나서서 정치적 대타협을 도출해야 한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출범과 함께 정치사회적 대타협 위원회를 발족시켜 선거 과정에서 경합했던 주요 정책들을 대화 테이블에 올려 국가적 과제에 대한 타협을 도출하는 방법도 있다.

최영기(한림대 객원교수·전 한국노동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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