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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너의 직함은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당신은 주로 무엇이라 불리는가. 나는 여러 가지 업에 종사하다 보니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 회사에 몸담았던 시절엔 ‘국장님’으로 불렸다. 광고회사 특유의 직급 인플레이션 결과일 뿐이었지만 아무튼 나는 가상의 국을 소유한 국장이었다. 회사엔 나 말고도 국장들이 우글거렸는데 가까운 이들끼리 서로 홍 국장, 김 국장 부르기 머쓱해 차라리 업종을 택했다. 그들에게 나는 ‘홍카피’였다.

업무 외에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창의노동을 할 때는 주로 ‘작가님’이라고 불렸다. 만화 일을 하며 미팅을 할 때, 글 청탁을 받을 때는 모두 나를 홍 작가님이라고 불렀다. 시인이 되고 나서는 종종 ‘시인님’이라는 흥미로운 호칭을 듣기도 한다. 감히 말하건대 대다수 시인이 본인을 ‘시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에 모종의 쑥스러움을 느낄 것이다. 나도 누군가가 ‘홍인혜 시인님’ 하고 부르는 순간 ‘시인이 직업인가? 시인에 님이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언어적으로 온당한가?’ 등등 생각의 숲에서 길을 잃곤 한다. 하지만 근래 타인을 부르는 가장 자연스러운 호칭은 ‘님’이고, 상대에게 ‘님’을 붙여주는 건 지극한 예의의 일환임을 알기에 잡념을 털어내고 ‘네!’ 하고 힘차게 대답한다.

나는 이따금 공공기관이나 사기업에서 강연하기도 하는데 그때는 ‘강사님’으로 불린다. 해당 업무를 보는 분들에게 익숙한 표현이라 그럴 것이다. 때로 나는 광고 아이디어를 내주는 일도 하는데 그때는 많은 회사에서 나를 ‘실장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또 환상의 실을 가진 실장이 됐다. 물론 이 호칭 역시 외주 업무를 담당하는 상대를 예의 바르게 불러주는, 일종의 직장 매너일 것이다.

한 번은 강원도 춘천의 한 중학교에 강연하러 간 적이 있다. 주제는 ‘직업 탐방’이었고, 도서실에서 서른 명 정도의 학생에게 내 다양한 업에 대해 소개해주는 자리였다. 나는 강연 경험이 적지 않은 축이지만 이 일은 내 생각보다 도전적인 경험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마이크를 들어온 많은 자리에선 청중이 나를 ‘알고’ 있었다. 북토크에는 내 글을 읽어준 독자분들이 오셨고, 라이브 방송에는 팬들이 와주셨다. 문화센터 강연이나 기업체 특강에는 적어도 내가 어떤 일을 해 왔고,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진 사람인지 알아주는 분들이 자리했다.

하지만 이날의 학생들은 당연하게도 내가 누군지, 뭘 하는 사람인지 까마득히 몰랐다. 심지어 학교에서 벌어지는 뭇 행사들이 그렇듯 딱히 자의로 온 것 같지도 않았다. 그들 앞에서 나는 국장님도 작가님도 시인님도 실장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뭐지? 나는 자연인 홍인혜가 돼 진땀을 흘렸다. 중학생들은 미지의 존재였다. 심지어 우리 사이엔 세대의 강이 도도하게 흘러 내가 들고 온 모든 예시들(내게 영감을 줬던 만화, 내가 만든 광고)을 청중은 하나도 알지 못했다. 그들은 5년 전엔 어린이였고 10년 전엔 유아기를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내 말이 가 닿기나 한 걸까, 살며 제일 아찔한 강연을 마치고 단상에서 긴 숨을 내쉬는데 학생들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리고 누군가 말했다. “선생님, 이제 어디 갈 거예요?” 그때 나는 알았다. 그들에게 나는 ‘선생님’이었다. 존칭으로 곧잘 쓰이는 아무개 선생님이 아니고 ‘teacher’라는 정직한 의미의 선생님 말이다. 왜냐하면 학생들의 눈에 강단에 서서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은 다 선생님이니까. 나는 이 호칭에 웃음이 나왔다. 내가 중학생 때 ‘선생님’이라는 존재들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떠올랐기 때문이다. 존경과 신뢰 같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었다. 친숙하면서도 약간 우습고, 나름 좋아하는 면도 있지만 뒤에서 욕하기도 했던 것이 ‘선생님들’ 아니었던가.

“선생님은 닭갈비 먹으러 갈 거예요.” 나의 이 말에 모두가 왁자지껄 본인들의 으뜸 닭갈비집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같이 셀카를 찍자고 했고 누군가는 필통에 사인을 해 달라고 했다. 선생님은 그렇게 했다.

홍인혜 시인·웹툰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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