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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공정’을 찾아서

백상진 정치부 기자


‘휴가’라는 단어가 모순적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본래 의미는 복잡다단한 업무에서 손을 떼고 휴식을 취하는 시간이라는 뜻이지만 대부분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동안 챙기지 못한 가족·친구들과의 만남에 더 바빠지기 일쑤다. ‘잃어버린 나를 되찾자’는 다짐을 반복하며 새로운 여행을 계획하거나 일 때문에 잊고 있었던 취미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피로가 더해지곤 한다. 물론 따분한 일상과는 비교하기 어렵지만 이 금쪽같은 시간을 덧없이 보내선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직장인에게 휴가란 온전한 휴식이라는 의미를 잃어버린 말일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말이 갖는 본래의 함의와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세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짧은 휴가를 내고 떠나는 여행은 온갖 기록과 인증으로 채워지기 마련이다. 유명 맛집 탐방과 휴양지에서의 체험활동 하나라도 더 하기 위한 여행, 곳곳의 흔적을 소셜미디어에 남기는 여행이 반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하 소설가가 “여행은 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잊어버리기 위해 가는 것”(‘여행의 이유’)이라고 한 지적을 되새겨보게 된다. 여행은 사회적 정체성을 하나 더 보태는 게 아니며, 익숙하지 않은 세계에서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경험이라고 그는 부연했다.

지난주 유력 대선 주자들의 출마선언문에 빠짐없이 등장한 ‘공정’이라는 단어를 보면서도 뭔가 특별하다는 인상은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식상하다는 느낌마저 밀려왔다. 누구나 문제라고 말하지만 정작 무엇이 잘못됐고 어떻게 해결할지 알맹이는 빠져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었다.

윤석열 전 검찰총장은 선언을 통해 “무너진 자유민주주의와 법치, 시대와 세대를 관통하는 공정의 가치를 기필코 다시 세우겠다”며 “정의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전에 누구나 정의로움을 일상에서 느끼게 하겠다”고 말했다. 이재명 경기지사는 “공정한 사회에는 꿈과 열정이 넘치지만 불공정한 사회는 좌절과 회피를 잉태한다”며 “규칙을 지켜도 손해가 없고 억울한 사람도 지역도 없는 나라, 기회는 공평하고 공정한 경쟁의 결과 합당한 보상이 주어지는 사회여야 미래가 있다”고 강조했다. 다른 주자들도 유행처럼 “불공정을 내가 바로잡겠다”며 대권 도전에 나선 상태다.

공정이 시대정신으로 부상하고 가장 유망한 정치 캠페인의 수단이 된 것은 문재인정부 4년간 드러난 불공정, 정권 핵심인사들의 ‘내로남불’에 대한 국민적 비판에서 비롯됐다.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는 잘 짜여진 대통령 취임사는 화려한 겉 포장일 뿐이라는 게 갈수록 확신으로 바뀌고 있다. 윤 전 총장은 현 정부를 향해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상식과 공정, 법치를 내팽개쳐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렸다”고 비판했다.

모두가 공정을 간판으로 내걸었지만 정작 무엇을 유권자들에게 내놓겠다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는 동안 정치권에서는 능력에 따른 경쟁이 가장 공정하다는 ‘능력주의’가 주목을 받고 있다. 무한 경쟁을 옹호한다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불공정에 지친 2030에게 능력에 따른 선발이 정치의 효능감을 줄 수 있다는 논리는 꽤 강력해 보인다.

링에 오른 대선 주자들의 공정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는 차차 드러날 것이다. 다만 과도한 기대는 금물이다. 경제력뿐 아니라 인맥과 학력 등 사회적 자본까지 대물림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해진 지금, 공정으로 가는 길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에서는 공정에 관한 담론이 현 정부가 반복한 실책을 비판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이미 출발선이 확연히 차이가 나는 상황에서 공정이란 무엇인가, 공정과 불공정의 경계란 어떠해야 하는지 충분한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권교체냐 정권 재창출이냐의 이분법, 정치적 열광과 비난에서 한발 물러나 이성적 해법을 모색하는 게 시작이 될 수 있다.

백상진 정치부 기자 shark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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