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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윰노트] 헤밍웨이는 왜 정신과 치료를 거부했을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진짜 남자가 되고 싶다면 헤밍웨이를 읽어라. 이 말은 내가 고등학생일 때 국어 선생님에게 들었다. 새로운 입시제도 덕분에 소설 읽기가 장려되던 때였다. 그래서 나도 청새치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의 모습을 얼핏 구경했지만, 진짜 남자와 헤밍웨이가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어렴풋이나마 알게 된 건 편집자가 되고 나서였다.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린 시절부터 낚시와 사냥을 즐겼던 헤밍웨이는 작가로서의 경험을 쌓기 위해 자발적으로 전쟁터를 누볐다. 권투와 투우를 배우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이 몽땅 투영된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문학사의 선두에서 찬연히 빛났다. 헤밍웨이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터프가이들은 작가의 모습 그 자체라고 봐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대작가의 말로는 그리 순탄치 않았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와일드한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을 하는 일이 어려워진 탓인지 후기의 작품들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비행기 사고를 두 번이나 당한 뒤로는 부상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만성적인 당뇨가 있었지만 술 마시기를 멈추지 않아 건강은 악화됐다. 미국 정보기관이 자신을 감시하고 있다고 여겨 노이로제까지 걸렸다. 이로 인해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헤밍웨이가 정신과 치료를 거부한 이유는 “마음이 아프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에게 있어서 ‘남자다움’을 포기하는 일이었기 때문”(호리에 히로키)이다. 결국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우울증이 치료를 필요로 하는 뇌질환이라는 건 이제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 한데 주요우울증이 생길 확률은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데도, 남성이 여성보다 목숨을 끊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보건복지부의 ‘2021 자살예방백서’에 따르면 2019년 우울증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사례를 성별로 구분했을 때 남성은 9730명으로 전체 사망자의 70.5%, 여성은 4069명으로 29.5%를 차지했다고 한다. 이상하지 않은가. 심한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은 남성들의 자살률이 왜 몇 배나 더 높은 걸까.

며칠 전 한강에 나갔다가 흥미로운 장면을 목격했다. 일고여덟 살쯤으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졌다. 나에게도 들릴 만큼 큰소리가 났으니 당사자도 놀랐으리라. 그러나 정작 아이의 아버지인 듯한 남자는 태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울지 마, 남자가 이런 일로 우는 거 아니야. 씩씩하게 혼자서 일어나야지.” 이제 아이는 한 가지를 배웠겠다. 남자는 자신의 고통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나도 아이와 비슷한 나이였을 때 조금이라도 ‘여성스러운’ 행동을 하면 따돌림에 나서는 또래들로부터, 그리고 “싸우면서 크는 거야,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라던 멘토들로부터 ‘남자다움’에 대해 배웠다.

울지 마라, 함부로 도움을 청하지 마라, 계집애처럼 굴지 마라, 약점을 보이지 마라, 인내하고 극기하라. 스스로의 감정을 부정하라는 요구를 지속해서 받으며 성별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무리에서 소외되는 일을 겪는 동안 자신의 느낌을 말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아이들이 자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문화비평가 벨 훅스는 자신의 저서에 이렇게 적었다. “많은 남성이 자신의 괴로움을 말하지 못한다. 괴로움을 인정하기보다 감추려 한다. 그것은 자신의 나약함이 드러날 거라는 두려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두려움이 심해질 때, 폭력을 행하고 다른 사람을 강제로 지배하고 학대하려는 욕구도 강해진다.”

그렇다면 지금껏 남자다워져야 한다는 가부장적 사회화 과정을 통해 정신적 외상을 입은 남성들이야말로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라고 명명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태양은 다시 떠오르게 마련이다. 이제는 슬슬 (나를 포함해) 남자들도, 공격해야 할 것은 ‘오조오억’이나 ‘손가락’이 아니라 가부장제라는 걸 깨달아야겠다. 그게 바로 헤밍웨이의 죽음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 아닐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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